紀行文(기행문) 殉敎先烈(순교선열) 遺址(유지) 踏查(답사) (1) 大小白山(대소백산) 골을 찾아서
崔南殉(최남순) 教史(교사) 編纂(편찬) 위해
발행일1965-09-12 [제486호, 4면]
본지와 「가톨릭 청년」 9월호에 소개하였음 같이 금년은 영남지방의 첫번째 교난이 일었던 1815년(乙亥)의 150주년에 해당되고 명년은 1866년(丙寅) 대교난의 백주년에 해당되는 경축의 해이다. 이 두가지 경축년을 맞아 기념사업의 하나로 교구에서는 순교자 기념 성당건립운동이 전개되고 「영남순교사」 편찬을 서둘게 되었다. 순교사를 꾸미는데 있어 본시 역사의 생명인 장소, 연월일, 인명, 사실의 정확을 기하여야 하므로 연월일과 인명과 사실은 많은 문헌을 참고하여 밝히겠거니와 특히 그 장소를 알려면 될 수 있는 한 답사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 필자는 여러해 전부터 영남 교난의 발상지와 그의 관계 지대를 알아보려는 것을 숙제(宿題)로 삼아왔다.
막상 원고를 집필함에 있어 다른 여건(與件)은 앉아서 여러 문헌 참조로 될 수 있는 일이겠으나, 관계되는 장소는 기어이 한번 찾아 그 확실성을 기하여야겠기에 방학을 이용하여 소기의 숙원을 풀어보려고 하였다.
문헌을 보면 영남의 천주교 요람지는 대소백산(大小白山) 줄기가 뻗어있는 도(道)의 북부 지대인 청송(靑松) 영양(英陽) 진보(珍寶) 안동(安東) 경주(慶州) 상주(尙州) 문경(聞慶) 순흥(順興) 등 깊은 산골이었는데 청송에는 「모래산」 영양진보에는 「머루산」 상주에는 「명의목」 「잣골」 「앵무당」 등이었고 순흥에는 「곰직이」 안동에는 「옛밭골」등이 그곳이다.
이런 여러곳에서 영남교회의 보금자리가 있어서 많은 교우들이 잡혀 그 고을의 해당되는 상급관청인 경주, 안동·상주를 거쳐 당시 경상남도의 감사(監司=現道知事) 소재지이던 대구로 넘어와서 최종심문과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 殉節의 靑松 두메엔 님자취 찾을 길 없어
그래서 필자는 8월 3일에 신암동(新岩洞) 동부선 주차장에서 정오 12시 50분발 청송행(靑松行) 「버스」에 몸을 실었다. 생후 처음 찾는 곳이라서 혼자가는 것보다 그 지대를 잘 아는 사람을 물색하던중 마침 예비신자중에 정(鄭)씨라는 분이 있어서 그와 동행하기로 하였다. 차는 청산은 아아하고 유수는 양양(靑山峨아·流水洋洋) 하다는 금호강 아양교(琴湖江아洋橋)를 지나 전국의 능금생산지로 유명한 동촌(東村) 과수원 속을 헤치며 하양(河陽)·영천(永川)으로 신명나게 달린다. 한때 물난리로 걱정하던 것 보다는 풍작의 물결이 구비치는 들을 지나서 청송군 안덕(安德) 정유소에 대기는 오후 5시경이었다.
차에서 내려 목적지 「모래산」으로 가는도중 안덕면(安德面) 복동(福洞)에 이르러 동행 정씨의 외사촌 형인 조봉학(趙鳳鶴)씨 댁에서 하루 밤 신세를 지고 그 이튿날 일찌기 걸어서 현서면 백자동(縣西面 백자洞=藝名 모래실=모래산)으로 갔다. 복동에서 10여리되는 자동차 길이었다. 백자동(모래산)의 현재 생긴 모습은 3각형 골짜기에 15·6호씩되는 세 부락이 음침한 산그늘 속에 잠겨 있었다.
거기서 사방으로 파고들은 심산궁곡은 부채살 모양으로 벌려있다. 그런데 이 지대의 산과 전답에는 백모래(白沙)가 많았다. 그래서 「모래실」 혹 「모래산」이라 불리운것 같다. 우리 순교선열들이 어느 골짜기에서 숨어 살다가 그해 부활주일에 인근 교촌 신자들까지 한데모여 기도문을 낭송하고 「알렐루야」를 노래하던 그 찰라에 청송읍 포교들의 급습(急襲)을 당하여 남녀노소 수백명신자가 일망타진되어 청송읍까지 먼길을 끌려갔던 것이고-.
그러나 살아있는 동민이 모르고, 말없는 청산이요 묵묵한 벽계수(碧溪水)이니 누구에게 물어본단 말인가! 가슴에 피어오르는 추억의 무지개는 오색이 영롱하건만 우리 님 살던 고장은 어이 모르겠는가!
그 동리에 사는 80여세 되는 조용소(趙鎔소) 노인에게 1백50여년 전에 이 산골에서 천주학을 믿던 사람들이 많이잡힌 전설을 들은 일이 있는가하고 물었더니 그의 대답이 그러한 말을 부노(父老)들로 부터 전해들은 일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네들이 어느 골짜기에 살다가 잡혔는지는 전연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천주교인이면 무슨 역적의 무리나 나라에서 마음대로 잡아 죽이는 사학군이라고 생각하였으니까 무슨 좋은 사실이라고 자자손손에게 알뜰히 살뜰히 전해주었겠는가? 잘 모른다는 것이 도리어 그네들의 솔직한 고백일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더한가지 알고 싶었던 사실은 그 때 잡힌 교우들 중에 유명하였던 고베드류·고요셉(高聖大·聖云) 형제분의 후손이 혹시나 살지 않나하는 일루의 희망 그것이었다. 그 노인에게 물었더니 자세히는 모르나 이 동리에서 누대로살던 고씨한집이 있었는데 나이많은 분은 벌써 죽고 그 자녀 손들은 6.25동란에 출전하여 전사하고 양손(養孫)되는 사람이 지금 영일군 기계면(迎日郡 杞溪面)으로 이사해 가고 없다고 한다.
그 고씨가문에 나이 많은 노인이 있었더면 좀 더 자세한 것을 알아보았을 것을, 젊은이들에게 물어보았자 잘모를 것 같아 단념 하였다. 그런데 수백명 교우들이 잡히던 날 고요셉(高聖云)은 평소에 힘이 장사라 처음에는 포졸들을 강도의 무리로 알고 팔을 걷고 나서며 『이놈들 내 주먹맛을 좀 볼터이냐』하고 대들다가 포교 두목이 품에서 청송원의(官長) 체포령을 내어 보기에 그만 순한양과 같이 고개를 숙이고 두손을 내어밀어 포승을 받았던 그 씩씩하고 용맹한 그 모습이 눈에 완연하였다.
부득이 그 곳을 떠날 수밖에 다른 볼일이 더 없었다. 거룩한 피땀이 방울방울 적시운 듯한 청송읍 길을 「버스」로 달리니 죄용하고도 부끄러운 마음 비할길 없었다. 남자들은 덜 하였지만 섬약한 부녀자들이 포승에 질려 돌자갈 가시밭길을 걸어서 끌려가던 그 거룩한 모습이 차창 유리문에 영사(映寫)되는 것 같았다.
오후 4시경에 읍에 도착하여 새로 섭리된 청송본당을 찾았다. 본당주임 여신부(呂·佛人)는 영양(英陽)으로 출장가고 없었다.
아담한 읍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고 새로 건축중인 성당과 강당은 읍 남편이 될 듯한 끝에 있었다.
우리 영남 교회의 발상지요 순교 선열의 피와 땀이 담뿍 적시운 이 고장에 백50년 만에 천주의 성전이 서게된 것은 당연한 일이면서도 천주의 섭리는 참으로 기묘하다는 것을 또 한번 느꼈다.
『순혈이 젖은 청송(靑松) 고을이여 우리선열들의 절개와 충의는 푸른 솔과 같이 언제나 푸르러라.
그리하여 당신들의 거룩한 피의 댓가는 오늘날 이룩되는 저 성전의 종탑에서 울려 나올 종소리에 읍민들이 복음 광명에 「알렐루야」를 부를 날이 멀지 않을 것으로 나타나리로다』 즉흥시(卽興詩) 한귀절을 읊어 보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