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SA 會議(회의)에서 돌아와서
敎會(교회)의 現代的(현대적) 課業(과업)
敎皇(교황), 貧困(빈곤) 打破(타파)하지 않고 救靈(구령)을 돌볼 수 없다.
-受助(수조)에서 動的(동적) 姿勢(자세)로 옮겨가야-
韓國(한국) 敎會司牧(교회사목)의 現代適應(현대적응)을 提議(제의)하며
불변의 교리와 교훈을 계승해왔기 때문에 시간과 환경 그리고 민족과 문화의 변천속에서도 한결같이 근본적 계시 진리를 유지하면서 존속하는 것이 교회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교회위 구성원은 인간이요, 인간이 주의환경과 세계사조의 영향을 받는것이 현실이기때문에 변천하는 역사와 사회환경속에서 때때로 동적역할보다는 오히려 수동적 모습을 교회가 드러낸 것도 사실이다. 이것이 현대에 이르러 더욱 현저해 졌다. 인류의 구령이란 본연의 사명을 수행해 나아가는데 있어서 구령이란 의의를 너무 일방적이고 부분적인 것으로 알아들었거나 또 옳게 이해했더라도 그대로 실천에 옮기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를 아직 모르는 많은 이들에게 교회란 인류의 구령을 위해 주로 자선사업을 통해 영세시킴으로써 주일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강론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준 것이다.
또 한편 변해가는 사회사조와 그 속에서 움직이는 인류를 그 사회에 알맞은 교리해석과 방법으로 선도해야함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불충분한 준비와 실질적 기술의 빈곤으로 의도하는 사명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것도 사실이다. 특히 근대초기부터 급진전한 자연 과학부문과 개선되어가는 경제면에 있어서 교회가 여기 적응하기에는 항상 뒤떨어진 감을 주고 있다.
이론면에 있어서도 새로운 어떤 학설이 나올때마다 그것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계시진리에 융화시킬 만큼 적절한 태도를 취하지 못했고 더우기 기술면에 있어서는 방관하고만 있는 상태였다.
인류전체가 교회의 자녀이고 또 그들을 구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면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너는 사회각계층에서 움직이는 인간하나하나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볼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이 완전한 존재가 아닌 이상 어떤 계급이나 직업을 가지든지 결함된 부분을 반드시 지니기 마련이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결함된 것을 제거하려고 할때 그 결함자체를 모르거나 이론과 기술을 모르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현대는 그 사회기구로서나 사상의 혼란으로서나 어느 시대보다 복잡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가 이 현대사회환경에서 허덕이는 인류구령에 임하는 태도도 그 어느 때보다 더 치밀하게 연구하고 노력함으로써만 인류구령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때 교회는 동적이 못되고 수동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망각하고 사회전체를 공동선을 토대로 이끌고 갈수 있는 원리원칙이 없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사회경제기구의 복잡성에서 오는 부작용이 심각한 것이다.
현대가 어느세기 보다도 더 많은 부(富)와 생활의 편의를 향유하지만 인류의 대부분을 어느 때보다 경제적으로 비참한 환경에 처해져 있게하는 모순상을 드러내고 있다.
여하한 이유인지는 모르나 신자들의 경제수준은 비신자들의 경제수준은 비산자들의 그것과 비교할때 차이가 생긴다. 여기서 신자들은 사회기구에 적응해야되고 거기서 자칫하면 현대인이 저지르는 의식적이 아닌 어떤 실수를 하게 된다. 그들이 사회일반의 그것과 병행하여 습득한 경제이론이나 기술이 새로운 것이라고 해서 교회가 그냥 당황할뿐 그들을 정확히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인상을 별로 주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레오 13세 성하로부터 오늘의 바오로 6세에 이르는 현대교황이 현대사회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회칙들을 통해서 교회의 참된 모습과 인류에 대한 관심을 지대하게 가진다는 것을 증명해 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칙이 제시한 사회질서의 원리원칙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 원인 중 가장 큰 것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성직자들의 변천하는 사회에 대한 무관심과 명백하게 제시한 사회경제회칙에 대한 불충실성이다. 아무리 훌륭하고 걸작인 사회회칙이라도 그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이해하고 실천에 옮길 입장에 있는 성직자들이 몸소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하등의 소용이 없는 것이다.
사실 우리 한국만하더라도 회칙 「지상의 평화」와 「어머니와 교사」를 통독한 신부님들이 몇 분이나 될까? 이것은 우리가 솔직히 자문해볼 문제이다. 이와같은 불행한 현실은 비단 우리시대가 우리민족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사회를 개선하거나 복잡한 주위환경에 옳게 적응하는 것이나 그때 그때의 세계사조를 계시 진리로써 정화하는 이론과 방법을 교회가 명백하게 제시하기는 하지만 성직자나 기성신자들의 무관심으로 인하여 그것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여 실천하는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들이다.
오늘날 사회 경제면에 있어서 급진전을 보이고 있는 공산주의 이론이 「유신과 무신」이란 문제를 제외하고선 교황의 사회회칙과 별다른 것이 없는 것을 보더라도 우리의 결점을 솔직히 신인해야할 것이다. 회칙 「레룸 노비룸」이 나온지가 74년전이고 「과드라 제시모 안노」는 34년전의 일이다. 이것을 이용한 이는 바로 유물론적 공산주의자들이 아닌가?
이제 교회내에서도 70년 늦게 눈을 떠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실정이다. 늦으나마 과거의 공허를 하루라도 일찍 보충하려면 지금이라도 사회회칙에 의한 교회의 새로운 사명수행이 시도되어야할 것이다. 그 한예로써 금년 8월 한달 동안 「홍콩」에서 개최된 「PISA」(사제들을 위한 아세아 사회경제연구회) 회의는 시대적 가치와 의의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토의 내용이 아주 훌륭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한달간 160명 이상의 성직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현대사회의 빈곤한층인 인간의 구령을 위해서 먼저 해결시켜주어야 할 문제가 바로 경제적 생활보장과 아울러 거기에 필요한 기술을 연구하고 토론하였다.
즉 이 문제를 중심으로 토론하고 진행된 것이 「PISA」 회의였다. 같은 성직자들이기에 거기에는 아무런 비밀이나 감추고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진정으로 신자들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적절한 이론과 기술을 모색했다고 본다.
회의의 결과가 어느 정도일지는 두고볼 문제이지만 적어도 사회의 현대생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제시한 하나의 시위였다는 점은 부인치 못할 것이다. 160명중 주교님세분이 끝까지 참석하셨지만 과거 신자나 신부들이 주교를 점찮은 분으로 생각한 것과는 달리 신부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행동을 했고 심지어 휴식시간에는 여자로 분장하여 춤까지 추셨다. 이것은 비록 하나의 간단한 예이지만 그곳에 참석한 신부들에게 정말 색다른 하나의 감동적인 인상을 주었다고 나는 보고 싶다.
솔직히 말해서 방학겸 「PISA」회의에 참석하려고 한것이 나뿐아니라 많은 신부님들의 생각이었음을 알았지만 회의가 끝난후 돌아갈 때에는 머리속에 무엇을 실천해보겠다는 구체적인 복안을 가진것 같이 보였다.
이 신부님들이 아세아 각국에 돌아가서 현대에 필요한 교회의 직접사회참여운동을 시작하고 이들을 통해 진리와 인간존엄성을 토대로 한 참된 사회혁명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지금 이 운동을 과거와 같이 신부들이 시작하지 않을때 우리 후대 언젠가에는 70년이 아니라 140년이 지나도 남에게 좋은일만 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 「남」이란 것이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인류전체를 멸망시키는 사상을 지닌 남이란 것을 알아야겠다.
李甲秀 神父(PISA 한국대표단 상임의장, 사회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