紀行文(기행문) 殉敎先烈(순교선열) 遺址(유지) 踏查(답사) (2)
<復活節(부활절) 지내다 數(수)10先烈(선열)들 잡힌>
史蹟(사적) 찾을 길 없는 珍寶(진보) 「머루山(산)」
崔南殉(최남순) 教史(교사) 編纂(편찬) 위해
발행일1965-09-19 [제487호, 4면]
신부와 회장을 못 만나니 더 머물 필요가 없어, 진보 「머루산」으로 가려고 「버스」 정류소로 오는 길에 군청에 들렸다. 새로 아담하게 지은 현대식건물 뒤에 고색이 창연(古色蒼然)한 묵은 개와집 두채를 발견하고, 짐작에 옛날 우리선열들을 몹시도 괴롭히던 소위 현감(縣監)의 아문(衙門)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이번은 영남 교난에 두번째 교우들이 많이 잡힌 진보(珍寶) 「머루산」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안동(安東)행 「버스」를 타고 진보를 지나서 원전(院田) 정류소에서 내려 「버스」를 갈아타고 머루산에서 약10리 상거인 「쟁인골」이란 동리에 도착한때는 이미 황혼이 짙은 일곱시가 훨씬넘은 때였다.
버스는 여기를 종착점으로하여 밤에 거기서 자고 아침에 거기서 떠난다고 한다. 그리고 보니 시발역(始發驛)도 되는 셈이다. 여관은 없고 어떤 집 사랑에 들어 하루밤 여장(旅裝)을 풀게되었으나, 그집 주인은 내묻는 말에 아주 문외한(門外漢) 이었다.
나이 50미만이니 그때 일을 알 수 없었을 것은 번연한 일이었다. 하루밤 모기와 씨름을 하고나서 아침 일찌기 목적지 「머루산」을 향하여 걸었다. 10여리 산길이라 야지(野地)에 15리 길도 넘는 듯 지루하였다. 우뚝 솟은 일월산(一月山) 맥맥(脈脈)이 굽이굽이 돌아서 높은 산 낮은 뫼를 이룩한 심산궁곡한 마을에 이르렀다.
여기는 현재 영양군 석포면 포산동(英陽君 石浦面 山洞) 옛날에는 진보(珍寶) 「머루산」이란 곳이었다. 머루나 포도나 매 한가진대 옛날에는 「머루산」 지금은 「포도산」이라고 한다. 산포도인 머루가 이곳의 명산이어서 일면 「머루산」이니 「포도산」이니 하는 이름이 생긴 것이라고 들었다.
포도산 한가운데 민듯한 대(臺)가 있고 그 대위에는 약 30두락이나 되는 논이 있었다. 벼도 잘 되었고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흉풍(凶豊)이 없는 옥답(沃畓)이라는 것이다. 마치 높은 책상 위에 올려놓은 바둑판과도 같았다. 이것은 조물주의 걸작의 하나이면서 세상살이에 약바른 인간의 지혜의 결정(結晶)인가 하였다.
20여호나 되는 동네 가운데는 예배당이 솟아있다. 처음에는 구세군(救世軍)의 예배당이던 것이 별로 발전이 없어 폐쇄되고, 장로교의 예배당으로 대체(代替)되었다는 것이다. 이 두메산꼴에 예배당이 서 있는 것은 그네들의 포교열(布敎熱)이 놀랍지만, 마음에 좀 섭섭하고도 애달픔은 생각은 이런 성지(聖地)에 순혈의 기념탑이나 그들이 죽음으로 증거하던 천주의 궁궐이 서있지 못한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 곳을 망라한 영양읍(英陽邑)에 본당이 신설되고, 천주의 성전이 웅장하게 서있으니, 장차는 여기에 불후(不朽)의 기념탑이라도 세워질 것만 같았다.
이상스런 논이 있는 남쪽에는 20리나 된다는 깊은 골짜기가 있다. 거기를 삼의동(三宜洞)이라 부른다.
우리의 선열들이 여기 논이 있는 구릉(丘陵)에 살지 않았다면 저기 삼의동 저 골짜기에 보이는 밭들이 그분들의 손으로 쪼은 화전(火田)이 아니었던가? 추억의 실머리는 한세기 반 옛날로 끌고 간다. 그 당시 몹쓸 놈의 배역자 전치수는 이 지대까지 불로소득(不勞所得)의 무대로 알고 찾아다니면서 밥도 빌고 옷도 빌던 곳이었는데 저의 허욕대로 신자들이 들어주지 않는다는 앙심을 품고 청송·진보·아문에 들어가서 밀고했던 관계로 그해 부활 주일과 그후 며칠만에 「모래산」과 여기 「머루산」 두곳의 교우 수삼백명을 결단내어, 모두 관할 관청으로 끌어갔던 것이다.
도중에서 굶주림과 노독으로 넘어지는 그들을 채찍으로 후려갈기면서 끌고 가던 그 정상이 눈에 완연하다.
그해를 중심으로 작금 양년의 흉년에 고금에도 드문 기근으로 굶어 죽는 사람이 길에서나 들에서 발길에 밟힐 정도였다니 우리선열들의 앞날이 말이 아니었었다. 문헌을 상고해보면 경주 안동 옥에서 무서운 형벌에 죽은 교우들 보다 굶어서 죽은 교우들의 수가 더 많았다 한다.
충청도 출신 교우들을 대구 감영에서 각기 본 고을로 보내는 도중에 20여명이 수중의 무일푼(無一分)인지라 주막에서 밥을 사먹고 밥값을 못물어 그대로 포졸들이 내어 버리고 갔기 때문에 모두 굶어 죽었다는 사실을 보아서도 그 때의 기근(饑饉)이 심하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청송 「모래산」에서 잡힌 교우 중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던 14명의 용사들이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기로 결정되었는데, 그중 7명이 출발전에 굶어죽고, 7명만이 대구로가서 또 다시 2명이 굶어죽고 5명이 순교하였고, 여기 「머루산」에서 잡힌 교우들은 안동 대부사(大府使) 아문을 거쳐 역시 대구감영으로 넘어간 사람이 8명이었는데, 그들중 4명이 옥에서 굶어죽고 남은 이들은 사식비(私食費)가 없어 모두 짚신을 삼아 그날그날의 호구책을 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마을의 노인들을 찾아 그 때의 사실을 물었더니, 부로(父老)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에, 많은 천주학군이 여기서 잡혀 갔다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 이상 더 알아볼래야 볼 수 없는 막연한 수수꺼끼 뿐이었다. 거룩한 유지(遺址)를 이렇게 하직하고 보니 무슨 빚을 잔뜩지고 떠나느듯 하였다. 다시 「쟁인골」로 와서 차를 타고 「원전」에 와서 안동행 차에 갈아타고 안동시로 직행하였다.
궂은비 부실부실 나리는 안동의 거리는 15·6년전에 한번 보았을때 6.25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던 황폐한 읍이었더니 이제 시(市)로 승격되고 면목이 그야말로 괄목상대(刮目相對)의 신흥 도시임에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안동은 영남 천주교 요람지대를 다스리는 중앙 본부로, 지금은 감목대리(監牧代理)가 주재하지만, 불원안동교구의 총본산(總本山)이 될 것이었다. 언제나 안동시를 지켜보는 듯한 성당! 높은 산꼭대기에 그 위용(偉容)을 자랑하는 그 모습! 반갑기 한량없다만 아무 신부도 계시지 않아 섭섭하게 그 곳을 떠나기로 하였다.
「엿밭골」! 우리 복자 김대건 신부님의 종조부 김안드레아(金宗漢=漢鉉)가 17년 동안 수도(修道)하시던 그 거룩한 곳이 어디엔지 알길이 없어 영주(榮州)가는 막차를 타고 비나리는 황혼길을 달려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