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라파 겉 핥기 錄(록) (32) 빠리의 첫날밤
망신당한 한국적 不信(불신)
외국인만이 판치는 빠리의 밤11시 거리
웃음파는 아가씨 잡히면 수녀원에서 이들을 拘留(구유)
발행일1966-08-28 [제532호, 3면]
습관적으로 모자를 안쓴 차림으로 무심히 나온 것이다. 그런데 나의 이 호소에 이 신부님은 무시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별반 관심을 안가져주는 긋해 야속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마침내 나는 점잖게 어린애처럼 조르기까지 했다.
『신부님 아까가던 중국집 근처에 가게되면 그집에 들러주세요』
신부님은
『네 그렇게 합시다, 이삼일 내로 그집 또 한번 가십시다 그려』
『그래요? 그래도 미리 내 모자를 오늘 거기다 뒤두고 왔으니 잘뒀다 달라고는 말해야 될게 아네요?』 하고 말했지만
『괜찮을 겁니다.』하고 무심한 태도이시다. 하는 수 없이 나도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끝내 신부님은 전화 한통 안걸어 주시는 것이었다. 며칠이 지난뒤 신부님은 또 그집엘 안내해 주었다. 함참 요리를 시키고 나서 신부님이 『여보, 그런데 요 며칠전에 왔을때 여기에 중절모자를 놓고 갔었는데…』하고 말하니까, 말이 미처 끝도 맺기 전에 공손히 내 잃었던 모자를 갖고 나오는 것이었다.
『자 여기 그대로 있읍니다.』하고 나한테 돌려준다. 신부님은 이같은 「빠리」의 풍속에 익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오늘을 기다린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어쨌든 그들은 서로 믿고 사는 습관이 있다. 그러니까 불란서 생활에 익은 신부님도 벌써 그들 생활에 익어 틀림없이 보관하고 있음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끝내 내 눈앞에 나타날 때까지는 믿을 수 없었던 한국적인 불신의 눈이 부끄럽기만 했다.
김영수 참사관이 초대한 만찬회는 「동아일보」의 이동수씨와 「연합신문」의 편집국장으로 있던 김창문씨가 초대되어 함께 어울렸다. 「쎈느」강 서쪽에 있는 중국집에 갔었다니 이번엔 동쪽에 있는 중국집엘 안내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온 손님을 대접하는데는 중국음식으로 대접하는 이상으로 좋아하는 것이 없다.
『여기 오신담엔 저한테 오늘의 「스케쥴」을 맡기셔야 합니다.』 말하는 투로 보아 오늘밤의 밤거리 구경을 시켜주겠다는 얘기 같았다.
관광객이 한번쯤은 구경간다는 「비갈로」란 곳에 안내한다. 밤11시부터 활기를 띤다는 거리다. 그야말로 「빠리」의 밤은 저물지 않는 그러한 환락가였다.
『아니 웬 사람이 이렇게 많아요?』
난 조용히 「네온사인」에 휘감겨 사는 인간상을 구경하느라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여기가 외화획득의 동네죠』
「나이트 클럽」마다 요란한 「프로그람」의 선전사진들을 전시하고 있고 「산뜻」한 제복의 수위들이 수문장처럼 지키고 있었다.
『아따 굉장하군』
밤거리에 밀물처럼 흐르고 있는 사람의 물결을 보고 감탄하고 있으려니까 『저 군중 속에 아마 「빠리」 사람은 별반 없을 것입니다.』 하고 김씨는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그래요? 그럼 다 어디 사람이죠?』
『일을 쏘다니는 사람들은 대개가 관광객들이고요. 그리고 「나이트 클럽」은 대개 이태리 사람 아니면 스페인 사람들이고요…』 하는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 불쏙 어떤 사람이 갈가에서 어슬렁대는 우리 앞에 와 담배불을 빌리자고 한다.
『담배불을 빌려주시겠어요?』
『아 네?』
나는 담배불을 빌려주었다. 그때 김씨는
『신선생 조심하시오』하면서 웃는다. 아닌게 아니라 그 담배불을 빌려달라는 사람은 젊은 아가씨였다.
『지금 몇시나 됐죠?』
그 아가씨는 영어로 묻는다. 나는 색다른 아가씨란 얘기를 듣고나서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버렸다. 나중에 들었더니 그들은 관광객 상대의 웃음파는 아가씨인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들 옆에는 순경이 어슬렁 거리고 있었는데 현행범이 아니면 체포 못하게 되어있다는 것이엇다.
그래 그들은 담배불을 붙이자고 간접적인 유인방법을 쓰는 것이라 했다. 현행범으로 이들이 붙들리면 이틀간의 구류 처분을 받는다는 것인데 형무소가 아니라 그들을 교화시킬 수 있는 곳으로 수녀원에 보내진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수녀님들 생활하는 속에 끼어 감화를 받게끔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