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우리 안에서] 본당신부 본당교우
발행일1966-08-28 [제532호, 4면]
■ 神父의 意見
사랑과 존경으로 신자도리를 완수
나는 본당신부로서 신자들에게 자기 본당신부에게 대한 의무에 대하여 몇 마디 하고저 한다.
어떤 인간사회단체에 있어서든지 각자가 자기의 의무를 잘 깨닫고 충실히 이행한다면 거기에 참된 평화와 융성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사람은 보통으로 타인에 대한 자기의 의무 보다는 자신에게 대한 타인의 의무를 잘 알고 또 주장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한국의 실정만 보고 판단한다면 우리 신자들은 이점에 있어 제외되는 것 같다. 물론 본당마다 유다스와 같은 신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보아 자기 본당신부에게 대한 신자들의 태도는 훌륭하다 할 것이다. 그래서 신자들의 의무에 대하여 이하 몇마디 하는 것은 우리 신자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원칙적으로 좀 더 명백히 해두려 하는 것 뿐이다.
①사랑, 우선 자기본당신부를 진정으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지극히 복되시고 지극히 신비로우신 천주성삼 안에 있어서나 천주님과 영혼 사이 그리고 영혼과 영혼 사이에 있어 결합시키고 단합시키는 매개체이다. 진정한 사랑이 있는 곳에 참된 평화와 단란이 있다. 바오로 종도께서는 「로마」인 신자들에게 각자 자신의 책무를 이행할 것을 촉구하신 후 『상호간의 사랑외에는 아무에게도 무슨 책무를 지지 말지니라』(로마서 13장 7-8) 하신다.
본당신부를 사랑해야 할 이유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바이다. 본당신부의 손으로 신자들은 성교회에 인도되어 천주의 자녀로 태어나게 되고 그를 통하여 죄의 사함을 받고 천상양식을 배령하고 그의 입을 통하여 천주의 말씀을 듣고 그 앞에서 축복을 받으며 백년해로의 계약을 맺고 그의 강복을 받으며 세상을 떠나게 된다. 본당신부는 진정 신자들의 행복을 위한 존재이다. 만일 어떤 본당신부가 바둑 낚시질 소풍 사냥을 본업으로 삼고 본당일을 부업으로 삼는다면 신자들은 그를 위하여 기구할 것이며 그로 하여금 신자들을 돌보는데 취미를 갖도록 더욱 열렬히 사랑해 주기를 바란다.
②존경, 윗 사람에 대한 참된 사랑은 항상 존경으로 표시된다. 사제를 존경해야 할 이유는 역시 신자라면 다 잘 알고 있는 바와같이 어떤 인간적인 우월성 때문이 아니라 그가 지니고 있는 신권(神權)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대리자이기 때문이다.
사제직은 사실상 인간의 이해를 훨씬 능가하는 어마어마한 직책이다. 물론 이를 남용하여 독선적이며 교태를 부리는 사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외로 취급할 것이다. 왜냐하면 참된 그리스도의 대리자는 그리스도와 같이 누구보다도 겸손할 것이니 말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한국신자들의 성직자에 대한 존경심은 대단한 것이다. 일부 성직자들의 불미스러운 생활과 그릇된 사조때문에 장래가 걱정스럽다.
③부조(扶助), 사제들의 본업은 영혼들의 성화(聖化)이니 신자들은 물질적인 부조에 인색하지 말기 바란다. 우리 신자들은 대부분 가난하다. 모르는 바 아니다. 아무리 가난하다 할지라도 1년 교무금 몇푼 때문에 냉담하는 신자들을 볼 때 기가 막힐 정도다.(C 神父)
■ 信者의 意見
「두르리라」하지말고 찾아가야
얼마나 기가막히게 밀접한 관계냐.
내 영혼의 마지막 삶가름을 맡겼고 내 영혼의 미묘한 동정(動靜)을 빠짐없이 살피며 은밀한 줄을 당겨 천주님께로 이끌어 주실 우리 본당신부님. 그 때문에 본당신부와 본당교우들 간에는 욕구불만이 항상 따르게 마련이다. 말이 많게 되어 있다. 서로 무관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우들 가정에 영화 배우 사진이나 아니면 세계적인 명화는 붙여놓아도 본당신부님의 사진을 모셔놓는 경우는 없다. 신부님 사무실에 성심상본과 자기가 건축한 성당사진은 달아놓아도 교우들의 사진을 붙여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이 과연 사랑하는 사람들의 관계일까? 기가 막히게 밀접한 관계이면서 그실 서로가 너무도 무관심하다.
오늘의 한국은 자식들을 단념한 아비처럼, 본당신부는 본당교우를 단념하고 학교사업에 열중하거나 하다못해 낚시질 사냥군으로 소일하는 실의(失意)의 성직자로 전락한 것 같다. 본당은 온종일 혹으 며칠씩 텅텅 비어 있기 일쑤다.
「예루살렘」 성전처럼 본당에는 신부와 교우가 항시 교류접촉해야 할 곳이 아니겠느냐.
교우는 본당에 예수 · 그리스도를 찾아간다. 목수의 아들, 작은 목수를 찾아간다. 거기에는 구슬받는 아전도, 대제관도 아닌 서민(庶民)의 아들 제2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할텐데, 잃었던 양이 속세를 헤매는 동안 얼마나 시일이 걸렸던지 그동안 우리의 목자는 완전히 근대화되어 2층 양옥에 근대적 장비에 「찝」차를 대기시켜 놓았으니 서민의 하소연이 통할리 없다 .이 거리감을 무엇으로 막으랴.
그런가 하면 본당신부는 그 마을 사람들이 수백명 수천명 살고 있는 가운데 교우들만 상대한다.
교우들만의 신부가 아니다.
앉아서 답답한 사람이 찾아오라고 한다. 목마른 사람을 『두드리라』고 할 때가 아니다. 본당 구역내 대중속에 파고 들어야 하겠다. 대중과의 거리를 없이 하고 대중 속에 생활하는 본당신부가 되어 주어야 하겠다.
그리스도가 영적을 행하고 교리를 가르치신 기간은 불과 3년 밖엔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서민들과의 대화의 광장을 위하여 30년이라는 세월을 계산하셨다.
본당신부와 교우가 상호이해를 위하여는 대화의 광장을 많이 마련해야 하겠고 대화에는 거리감이 없어야 하겠다. 거리감이 없어지려면 그리스도의 사생활을 모범으로 하여 생활해야 하겠다. 본당신부는 1966년 8월 현재의 이 혼란한 한국 농어촌과 도시 서민들 한가운데 거(居)하시는 그리스도다. 우리 교우가 우리와 같이 사는 예수 · 그리스도를 또 한번 못본체 하고 죽이겠는가. (익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