丙寅(병인)순교기념 行事(행사)에 관한 私考(사고)
紀念碑的(기념비적) 센타 建立(건립) · 放送事業(방송사업) 했으면
內部的(내부적) 行事(행사)로만 그쳐서야…
第(제)2丙寅(병인) 되게 해야
겨레와의 對話契機(대화계기) 만들길
이미 各敎區마다 丙寅殉敎記念行事나 事業計劃을 발표하였고 또 서울大敎區가 시작한 切頭山 丙寅年殉敎記念會館 建立이 全國的 事業으로 넓혀졌다고 듣고있다.
「가톨릭時報」가 設定한 題目은 이러한 旣定事實에 대한 論議의 可否를 명백히 하지 않고 있다. 筆者는 이 問題에 따르는 여러가지 雜音 例컨대 순교복자현양회 모금의 뒷처리의 개운치 않는 점과 切頭山記念館 設立의 意義와 計劃의 現代感覺과의 隔差에 눈가리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미 進行中에 있는 記念事業에 대한 論議는 오히려 부질없는 짓이라고 보며 다만 여기서는 이 記念行事나 事業에 대하여 一平信徒가 構想해 본 「이미지」를 기리려는 것일 뿐이지 이러한 公的事業에 대한 反對나 不和音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짐해 둔다.
먼저 이런 性質의 事業은 「紀念」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상 순수한 內面的이거나 敎會內部的일순 없는 것임을 再確認하고 싶다. 더구나 第二차 「바티깐」 公議會의 力点의 하나인 「世界와의 對話」가 하나의 切實한 要請이 되었고 第二의 丙寅年에 이것이 課해졌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면서도 殉敎者의 精神의 昻揚과 致命者의 현양도 아울러 適切하고도 高度의 表現을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原則 아래 몇가지 結論을 지어보자면 이 歷史的 계기의 크나큰 意義를 살릴 수 있는 內容과 方法을 갖춘 事業은 누구나 다 贊同할 수 있으며 協助할 수 있는 또 國內 뿐만 아니라 國際的으로도 實로 紀念碑的(MONUMENTAL)이며 雄大한 事業만이 될 수 있다.
그것은 非活動的靜的인 周邊的인 것이 아니라 殉敎者의 피와 같이 未來에의 無限한 成長과 活動의 核을 內包하며 또 그 動脈이며 中心이 될 것이다. 或者는 기념聖堂을 建立한다. 기념奬學金을 設定한다 등 多岐的行事와 事業을 論하지만 筆者는 한국뿐만 아니라 世界가 刮目할만한 金字塔的인 活用的인 大事業에 集中시켜야 한다고 본다. 도대체 한국가톨릭敎會는 世界에 對해서 望樓가 되며 道標가 될 일을 아직 못하고 있다.
例를 들자면 YMCA와 같은 綜合的이며 多角的 施設의 必要性을 느낀 것은 筆者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 언제까지 殉敎한 祖上의 功에 업혀 그들의 業績만 자랑하고 지내는 것이 能事가 아닐 것이며 現代에 있어서 殉敎는 못할망정 그들의 精神을 繼承하며 현양하는 行動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名實共히 「가톨릭센타」가 될만한 것의 建立이겠다. 胎呸的인 이 「센타」는 「가톨릭 액숀」의 모든 系統과 大講堂 集會室, 講義室, 會議室, 圖書館, 食堂, 聖堂 등 綜合的인 施設을 갖추어 있으므로 이것이야 말로 紀念碑的 事業이며 이것이 交通이 不便한 변두리가 아니고 都心地에 位置한다면 이것은 恒續的 動的인 記念行事가 됨에 틀림 없다.
現今 敎會의 모든 散在 努力을 集中統一해서 有機的으로 運營한다 해도 時代와 世界의 要請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로 부터 받은 使命을 다할까 말까 하는데 우선 空間的이라도 이러한 活動의 有機的 集中을 試圖하는 努力이 아쉬우니 이런 構想도 나오게 되는 것이다.
다음 또 한가지 「모뮤멘탈」한 것은 放送事業이다. 라디오나 TV를 通해서는 사람들이 敎會의 門을 두드리러 올 때까지 束手 기다리지 않고 그리스도를 各家庭에 各 靈魂 속으로 인도해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放送을 通한 使徒的行爲는 再論의 餘地가 없을만치 重要한 것이며 이것이 等閑視 되고 여기에 關한 努力이 없다는 것은 前近代的 傳敎方法에 依存하고 있다고 밖엔 볼 수 없다.
勿論 筆者는 라디오나 TV 施設과 運營에 따르는 全般의 因難과 難關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한국의 敎會가 다른 方面에 消費하는 努力을 생각할 때 반드시 이것이 不可能한 것이 아니라고 確信하며 우리가 先代殉敎者의 피에 報答할 수 있는 가장 適合한 事業이며 行事라고 믿는 바이다.
金圭煥(국제신문인협회 한국사무국장, 東洋通信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