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敎實話(전교실화)] 길 잃은 양을 위해 (6) 인민군 공작선 기관장 ①
발행일1966-09-04 [제533호, 2면]
723번, 박인택(52세).
내가 그와 가깝게 된 것은 작년인가 하여간 뒤늦게서였다. 5척 남짓한 키에 동글 납작한 얼굴, 그리고 두터운 입술과 길죽한 눈은 어딘지 매혹적이었고 세속의 오뇌를 씻기 위함인가 삭발을 한 조용한 모습은 어느 산사의 스님같다.
그러나 말할때마다 송곳니 옆으로 드러나 보이는 금니와 그 침착한 목소리가 젊어서는 꽤 「젠틀」했으리라.
평소와 같이 「경향잡지」나 「가톨릭시보」가 나오면 극형수들에게 한장씩 나누어주며 나는 그를 무심히 그냥 넘기기를 한두번이 아니었고 서로 얼굴을 대더라도 간단한 목례 정도에 그칠 뿐이었다.
간첩이란 그의 죄명에 대한 선입감에서 였을까. 이렇게 지내오던 중 그는 자연히 나의 관심을 끌었다. 언제보아도 그의 태도는 항상 무게가 있었고 겸손하며 후에 알고보니 세까지 받은 사람으로 그간 차별대우를 한 나 자신의 편협한 전교태도를 스스로 책망하며 그때부터 그와 가깝게 되었다.
그는 황해도 출신으로 15세때 군산에 있는 사립학교인 영명학교를 졸업했다. 19세때 인천에 있는 어다복주식회사에 자동차 조수로 3년간 일하게 되었다.
그후 그는 7년간의 운전수 생활을 통하여 나중엔 어다복주식회사의 수리공장을 경영하게 된 것이 10년째 1950년. 6.25 동란이 일어나자 공장은 폐업을 하고 그해 8월 3일경 인문긴 자동차 수리공으로 종사하다가 괴뢰군의 패전과 함께 월북하여 인민군 제3단 통신대무전기 수리공으로 종사하며 노동당에 가입했다.
1954년 3월 28일 제대와 동시에 워산에 있는 자동차 수리공에 배치되어 일했으나 그해 10월 16일 제931군부대로 소환, 공작선기관장으로 있던중 1958년 7월 8일 동부대 부대장 유성조의 지령으로 남파한 간첩 권기석을 월북시키기 위한 공작선기관장의 임무를 띠고 수송 도중 동월 10일 최연출, 이창옥 등과 함께 강원도 양양 앞바다에서 한국 제66호 함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이데오르기」가 무엇인지 알기나 했습니까? 그저 기술이 있다는 덕분에 약삭빠른척하고 총뿌리 앞에서 그때그때 목숨이나 건지려고 한 짓이 그만 이런 엉뚱한 함정에 빠지고 말았으니 정말 지난날이 뼈져릴 뿐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자만이 제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이 뜻을 이제야 알겠군요』
이렇게 말하는 그는 확실히 과거 공산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을 후회하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뉘있어 이를 미워할 수 있을까? 이 모두가 민족적인 불행의 희생자가 아닌가? 1959년 9월 4일.
지법에서 일심판결에 사형언도를 받고 그때 12월 16일 이심 역시 기각을 당한채 그는 매일과 같이 감방안에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있노라니 하루는 그에게 「노인 문답책」과 함께 명함 한장이 날라왔다. 이 명함이 주인공이야말로 바로 그 당시 서울지방법원에 계시던 저 유명한 김홍섭 판사였던 것이다.
청렴결백하고 겸손하기로 이름난 김 판사야말로 이 교도소 안의 전교사업을 처음으로 시작한 분이다.
김판사는 스스로 죄인을 재판하는 법관이면서도 그는 일단 직무를 떠나서는 진정 법을 초월하여 죄수를 개인개인이 정상에 깊이 귀를 기울이며 이들을 이해하고 동정해마지 않았다.
그런 나머지 김 판사는 그들에게 이 세상의 불우하고 억울한 운명에 대해서 그들에게 보다 많은 피안의 보상을 깨닫게 하고 영혼의 위로를 얻게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인 진정한 「휴메니스트」다. 그의 이런 인간애는 숱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겻고 그중 하나를 소개하면 -. 그는 어느때 휴가를 틈타서 초라한 「고르댕」 바지에 지팡이를 짚고 충청도 어느고을에 전교하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