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K에서 集計發表한 今年度(65年-66년 6月) 우리나라의 敎勢統計에 依하면 全體敎友數가 70萬6千餘名으로 昨年同期에 比해서 萬7千5百30名의 增加로 極히 不振한 數字를 보이고 있다. 前年度 敎友數와의 增加率을 보면 58年의 6萬9千89名(19.9%) 增加를 고비로 해마다 低下해서 今年은 不過 5.3%로 近年은 가장 不振한 增加率이며 한편 對人口比敎友數의 比率을 보면 56年의 1.1%에서 漸次 上昇하여 65年度의 2.27%, 66年이 2.42%로 于先은 增加된 것 같이 보이나 人口의 年刊增加率을 65年에 2.7%로 보고 第2次 5個年計劃의 終3年度인 71年까지는 230%線까지 減少케 한다는 政府施策을 考慮에 넣는다면(그 實現可能性을 疑心하는 바이나) 敎勢의 增加가 아니라 人口增加率의 減少로 오는 結果로 보아야 할 것이며 敎友의 增加率은 人口의 自然增加率을 依然 따르지 못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 우리를 놀라게 하고 歎息케 하는 것은 冷淡敎友의 數字다. 冷淡信者는 61年에서 敎友數의 4.04%인 約2萬名이던 것이 漸次 增加一路로 今年度에는 4萬4千6百明 6.33%나 늘어났다.
다시 말하면 現在敎會의 우리를 떠나있는 우리의 兄弟들이 昨年1年間 우리안에 들어온 兄弟들 數 보다 8千5百名이나 더 많은 것이다. 우리가 얻은 것 보다 잃은 것이 現在로서는 더 많은 結果가 되고 말았다. 이 統計表의 다른 數字를 보면 本堂數도 增加했고 韓國人 神父 修士 修女 神學生도 다 많은 增加를 보이고 있으며 其他 敎會의 施設들은 다 數字的 增加를 보여 可視的인 資産은 優勢를 取하고 있으나 敎會의 本質的인 傳敎面에서는 잃은 것이 더 많다는 結果가 되고 말았다. 即 우리는 事業에는 성공했으나 알맹이는 놓치고 있는 것이다.
以上 大總 數字를 살펴볼 때 우리는 이 敎勢表를 앞에 놓고 깊은 反省과 새로운 覺悟가 있어야 하겠다. 그리스도敎의 本質은 傳敎에 있다.
傳敎는 聖職者만의 義務가 아니요 오히려 信者들의 醫務인 것이다. 一年동안 한 사람의 靈魂도 敎會로 引導하지 안했다면 自己 本分을 다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은 벌써 敎友가 아니라는 極言을 들어도 決코 過하다 하지 못할 것이다. 信者倍加運動이라는 騷亂한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信者 한사람이 한사람의 靈魂을 爲하여 完全한 愛德의 生活을 實踐했다면 今年度 敎勢表가 이런 꼴로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現信者數의 倍數는 百41萬2千이다. 天主님의 眞理를 알아듣는 참다운 信者라면 이 數字가 決코 不可能한 數字라고 하지 못하리라.
經濟開發을 爲한 各種施策이 進展됨에 따라 國民所得은 漸次 늘어간다. 다시말하면 國民들의 肉身生活은 潤澤해진다. 그러나 그 反面 惑은 거이에 比例해서 國民들의 精神生活은 더욱더 空虛해지며 生의 目的을 잃은 無秩序와 墮落의 길을 걷고 있다는 事實을 現下 우리가 目擊하고 있는 바이다. 우리의 先烈殉敎福者들의 愛國愛族의 精神을 따른다면 救國의 길은 國民에게 天主님의 사랑을 證明하고 우리 스스로가 그 證人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今年은 마침 丙寅殉敎百週年이다. 이 聖年의 記念事業으로 다른 무슨 記念事業보다, 다른 어떤 建造物보다 먼저 우리는 옳은 敎友의 數를 增加시켜 殉敎者들의 피에 報答해야 되지 않겠는가.
해마다 한번씩 敎勢를 集計發表하고 우리는 한차례 그 數字를 훑어보며 한사람이라도 敎友의 數가 늘어났으니 多幸이라고 自覺하고 만다. 年中行事의 하나로 아무 反省도 없이 받아 넘겨 또 一年이 空轉하기 일쑤다. 冷淡者의 數가 激增했다. 그러면 우리는 卽時 그 理由를 알아야 한다. 細密한 科學的 分析과 綜合的 判斷이 있고 이 判斷에 依據, 活動의 方法을 硏究하는 것이 通例이거늘 本堂에는 이러한 아무 機構도 없다. 全般的으로 本堂運營이며 傳敎活動에 아무런 科學的 硏究도 없고 地域社會에 對한 아무런 知識도 없이 우리는 어떤 요행만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点에 있어서는 交友個個人의 姿勢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信徒使徒職에 對한 知識의 不足이 傳敎不振의 最大의 原因이요 旣成信者의 敎理 등 교육의 不足이 理由임을 우리는 斷定하는 바이나, 敎會憲章의 第4章 「信者들에 對한」 대목에는 「證明」과 「證人」이라는 用語가 많이 쓰인다. 이 말이 곧 信者들의 使命을 말하는 것이다. 「每日 아침 미사에 參禮하는」 것만을 자랑하고 自慰하는 所謂 「舊敎友的」 姿勢만으로는 傳敎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傳敎를 妨害하는 例가 許多하다는 말도 있다.
敎友는 俗世에 산다. 그 地域社會의 一個構成要員으로 다른 未信者와 生活을 같이 할 때 오직 表現될 수 있는 것은 愛德을 「證明」하고 愛德의 「證人」이 되는 길 밖에 없다. 이것이 곧 信者使徒職의 첫째 使命인 것이다 .
우리가 「敎會」라고 할 때 決코 聖堂建物이나 聖職者를 뜻하지 않는다. 敎友가 곧 敎會다. 敎會는 世俗에서 生活한다. 敎會가 世俗에서 證明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敎會에 協力하라고 하면 協力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從屬的인 協力이다. 우리가 强調하고 싶은 것은 能動的 協力이다. 敎會憲章 第4章32項의 精神은 聖職者의 使徒職에 敎友가 能動的으로 協力하고 聖職者는 信者의 使徒職에 能動的으로 協力할 것을 命하고 있는 것이다. 敎友諸兄들의 傳敎活動에 大悟一番 새로운 覺醒있기를 促求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