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천주교회사는 피어린 박해의 기록으로 시종되어 있다. 1784년에 베드루 이승훈(李承薰)의 입교로 출발하여 1886년 한·불수호조약(韓·佛修好條約)의 체결로서 전교활동의 자유가 보장될 때까지의 100여년 간에 걸친 박해시대는 물론이거니와 그후 오늘날까지 약80년간의 교회사도 또한 가시밭의 수난사였다.
이른바 3대 박해라는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그리고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는 물론 기타 유명무명의 박해 사건이 끊임없이 우리 강산을 엄습함으로써 우리 강산은 악형(惡刑)과 학살(虐殺)로 인한 피로 물들였으며 시산혈하(屍山血河)를 거듭 이루었다. 이 무서운 박해의 고난은 우리 교회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2)
거듭되는 박해는 우리 겨레의 신앙심을 꺾기는 커녕 우리교회의 영광을 더하였다. 박해가 거듭될수록 우리교회의 신도수는 배가되는 기적적 발전을 보이었다.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풍우성상(風雨星霜)을 거치는 동안 모진일 숱하게 당하나 마침내 수다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음과 같이 성풍(腥風)이 휘몰아 치고 혈우(血雨)가 쏟아지는 고난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교회는 자라나왔다. 때리면 때릴수록 일어나는 재(灰)와도 같이 박해할수록 그 교세는 자라났다.
이웃 일본천주교회가 방지거 성인 전도후는 한때 수십만의 신도를 헤아렸으나 「도꾸가와」 막부(德川家康)의 철저한 박해로 그 자취조차 찾을 수 없이 소멸되었음으로써 현재의 일본 천주교회가 그후이 재전도(再傳道)활동에 의한 것임을 상기할 때 우리 교회의 강인성과 연명성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
또한 명(明)말 마테오 릿치 신부의 전도이후 수다한 신도를 자랑할만치 발전하였던 중국천주교회가 전례문제(典禮問題)로 인한 청국의 철저한 탄압에 못이겨 겨우 명백을 유지케 되었던 중국 천주교회사에 비추어볼 때 세계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혹독한 박해를 1세기나 당하면서도 발전을 거듭한 우리 교회의 자랑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더우기 그 발전이 교회 탄생 후 10년간 신유박해 후 33년간, 기해박해 후 6년간 성직자를 갖지 못한 목자(牧者) 없는 양떼의 외롭고 버려진 상태의 교회시대에 더욱 빛났던 것이다.
(3)
누설망도(누설望道)하고 포청옥만(捕廳獄滿)하였으며 기시여산적(棄屍如山積)이라는 박해는 우리 겨레의 신앙의 심화(深化)를 가져다 주었다.
박해는 순교를 강요하였으며 기라성(綺羅星)과 같이 천당에서 빛날 수다한 순교자를 낳았다. 천주대전에 혈제(血祭)로써 신앙을 증거하고 즐거이 숨져간 숭고한 순교정신은 살아남은 교우에게 고귀한 교훈이 되었으며 미신자들에게는 경탄(驚嘆)의 재료가 되었다. 그리하여 더욱 순교정신이 현양되었고, 탄복한 미신자들의 입교를 촉구하였다.
죽음 앞에서 천국의 문이 활짝 열렸음을 확신하고 자신만만하게 칼날 또는 곤장 아래서, 또는 밧줄에 달려 순교한 그 정신은 길이 우리 교회에 영향을 남겼다. 어느때 직면케 될지 모르는 박해에 대비하여 더욱 신앙의 불꽃을 태워 현세의 시련에 견디어 낼 수 있는 불의의 신앙생활을 견지토록 자극을 주었다.
이러한 굳은 신앙이 있었으므로써 우리 교회는 성직자 없을 때에는 평신도들에 의하여 흩어진 교회가 재편되고 성직자를 영입하였으며 교회는 발전되었던 것이다.
(4)
1세기간의 박해는 우리 교회의 전교지역을 확대케 하였고 우리 교회에의 귀의열을 일으켜 주었다.
초기 한국천주교회의 전교지역은 대략 서울을 중심한 경향지방(京鄕地方)과 이단원(李端源)에 의해 씨가 뿌려진 충청도의 내포지방(內浦地方) 그리고 유항검(柳恒儉)에 의하여 가꾸어진 전라도의 전주지방의 세곳이었다.
이 세 지방을 중심으로 우리 교회가 자라던 것인데 거듭되는 박해 가운데 살아남은 교우들은 신앙 생활이 안전을 위하여 차차 산간벽지로 찾아들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기해박해 후 더욱 현저하여 태백산맥 줄기의 강원도 경상도 산간지방으로, 소백산맥 줄기의 전라도 벽촌 지방으로 옮아가 새로운 교우의 취락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마침내 삼남 각지에 뿌리를 박게 되었다. 후려치는 씨알이 타작마당 밖에 사방으로 날아가 열매를 맺듯이 전국으로 전파된 것이었다.
한편 박해자의 난동은 사회불안을 더하게 하였으며 관료의 토색과 횡포 가운데 현실 생활에 시다리는 군중들은 보다 진실한 정신적 위안을 갈구하게 되었으며 이 절실한 정신적 안정감을 사랑과 평등의 복음 가운데 찾게되니 우리교회로의 귀의열(歸依熱)이 높아졌으며 이러한 가운데 신앙의 문을 두드리게 된, 깨달은 교인들의 신앙은 무서운 생명의 위협을 강요하는 박해로 꺾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李元淳(史學家, 漢陽大 敎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