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敎實話(전교실화)] 길 잃은 양을 위해 (7) 인민군 공작선 기관장 ②
발행일1965-09-11 [제534호, 2면]
김 판사의 하도 초라하고 수상한 주재에 경찰관이 불심검문을 했다.
『전 판사입니다』 그의 이런 대답헤 순경은 어이없이 실소를 터뜨리며 아마 정신나간 사람이 아니냐고 대뜸 호통을 치며 신분증을 내라고 했다. 김 판사는 아무말 없이 담담히 신분증을 내밀었다. 그의 신분증을 본 경찰관은 대경실색을 갑자기 「차렷」 부동자세를 하고 그의 무례를 백배사죄했다.
『괜찮아요. 그런수도 있지』 이러한 봉변을 당하고도 오히려 상대방의 사죄에 민방해서 김 판사는 경찰관의 어깨를 두드리며 미소를 지었다.
김 판사는 박인택에게 명함에다 다음같이 써서 보냈다.
『문의할 것이 있으면 편지하시오』
이것을 본 박은 과거 학생시절에 프로테스탄 교회에 조금 다닌 적도 있어 다시 신앙생활을 갖고싶은마음에서 엽서한장을 띄웠다.
그러자 얼마후 그에게 면회온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김 판사였다. 길쭉한 얼굴에 후리 후리한 키, 김 판사는 만나는 첫마디에 『우리 종교외에는 아무말도 맙시다』하더란 것이다. 그로부터 김 판사님에게 여러가지 교리를 들었으며 무엇보다 먼저 그의 너그럽고 인자한 인품에 감동되었다.
1960년 4월 11일 김 판사님 자신 스스로 대부가 되어 세종로성당 박귀훈 신부님이 오셔서 영세하니 그의 본명은 바오로다.
그뒤 바오로는 한번인가 더 김 판사를 만났으나 인사이동으로 김 판사가 지방에 가자 영 만날 수가 없게 되었다.
백 신부님이 가끔 오셔서 교무과로 연출하여 그의 신앙을 두텁게 했으나 항시 김 판사님을 다시 뵙고 싶은 간절한 아쉬움을 지닌채 주소를 몰라 편지 한장 내지 못했다.
그러던중 소내 「새빛」 신문을 통해 김판사님이 다시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전출된 것을 알고 불원만나게 되려니 기대에 차 있을 무렵 작년 가을 10월경 갑자기 세상을 떠나 끝내 그를 다시 만나지 못했노라고 그는 깊은 한숨을 지으면서 『이제 그는 천주님 곁으로 가셨겠지요』하면서 숙연히 고개를 떨구었다. 이야말로 한 어버이를 그리는 듯한 판사와 사형수 간의 따뜻한 인정가화는 단순한 세상의 안간애를 훨씬 넘는 어떤 교훈을 우리에게 준다. 그가 가르친 교리만이 아닌 그가 풍긴 무언의 사랑을 통해 이 사형수는 오히려 신앙에의 지름길을 찾은 것이 아닐까.
그는 「서억인의 신앙」 「20세기 개종자들」 등 열심히 독서를 하며 천주님께 기구할적마다 김 판사님의 명복을 빈다.
『체포당시 같이 있었던 공범 최연출과 이창옥도 모두 김 판사님의 전교로 요왕, 베드루로 각각 세를 받았읍니다. 이창옥은 2사상 22방에 있으며 열심히 기구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최연출은 작년 가을 어느 주일날 갑자기 뇌일혈로 죽었다는데 그것 역시 천주님의 특별하신 은총인가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는 이젠 괴뢰군 공작선의 키를 잡은 기관장이 아니라 천국행 조각배의 키를 잡은 늙은 어부의 침착한 태도다 1965년 10월 19일에 그는 박귀훈 신부님에 의해 주교님 허락으로 내가 대부가 되어 견진까지 받았다. 1960년 3월 31일 3심도 기각을 당한채 1965년 3월 재심청구를 하고 이제 조용히 결정의 날을 기다리며 독서에 열중한 그는 특별히 「동서에의 彼岸」(오경웅 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겸손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7년간의 영어 생활 중 여러번의 전방을 했고 지금은 6사하 2방에 있다.
『땡… 땡… 땡』 새벽종이 울리면 그는 반드시 몸을 단정히 정좌하고 기구를 올린다. 이제 그의 마음은 지상의 옥중에서 이미 평화를 얻은 것이다.
▲추고=이 원고 집필중 66년 4월 25일 12시 그는 끝내 담담한 표정으로 말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날은 공군 종군신부인 김치삼 중령이 오셨고 그는 최후까지 참착한 자세로 신부께 고명을 한 후 주위를 둘러보고 다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뿐이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