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라파 겉 핥기 錄(록) (33) 빠리의 환락가
환락가 관광객에 맡기고
「빠리장」들은 외국서 夏休(하휴)
「빠리」는 올빼미 거리
WC선 5천원을 「팁」
발행일1965-09-11 [제534호, 3면]
「빠리장」(빠리 사람들)들은 온통 자기가 살던 「빠리」시를 관광객들에게 내놓고 여름 휴가를 즐긴다는 9월이었다.
7월서부터 9월까지는 「빠리」를 외국인에게 맡기고 「빠리장」들은 딴고장으로 가서 휴양을 한다는 때다.
「빠리」 사람들은 이때를 이용해서 전지생활을 하지 않으면 습기가 많은 곳이라 신경통을 얻기 쉽다는 과학적인 미신을 갖고 있었다.
하기는 내가 잘 아는 정 말가리다(숙정)씨도 오랜동안의 「빠리」생활에서 신경통을 얻어 「로마」에서 다리를 앓고 있는 것을 보면 「빠리」에서 여름휴가를 활동하지 못한 가난이 발병의 원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정도였다. (지금 정씨는 건강이 회복되어 귀국한 뒤 고려대학 불문과에서 교편을 잡고 있지만) 어쨌든 내가 「빠리」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바로 외국 관광객들에 의해 「빠리」 도시가 완전히 점거당한 철이었다.
그러니까 「빠리」시가는 외국손님으로 들끓고 놀아나는 때인 것만 같았다.
낯선 땅에 도착하면 대개의 경우 그곳 교포들은 밤의 환락가를 구경시키는 것을 하나의 「에티켓」으로 아는 모양이었다. 더우기 언론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라 하니까 밤의 「빠리」를 구경시켜야 하겠다는 것이 당연한 「서비스」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는 「빠리」의 밤의 생태를 점검할 겸 해서 이 리노 신부님께 관면(?)을 받고 「동아일보」의 이동수씨(현재 편집부장)와 함께 한국대사관의 참사관의 안내를 기꺼이 받기로 했다.
「비갈르」란 곳은 올빼미 생리를 닮은 곳이었다. 낮에는 잠자고 밤에 호화로운 전광을 밝히고 「빠리」의 밤을 도맡은 곳이란다. 밤의 「빠리」가 시작되는 곳, 밤에만 개점되는 곳이다. 낮처럼 밝은 이 거리에는 사람의 물결이 흐르고 있다.
구라파 문화의 중심지이며 예술의 중심지라고 하는 이곳에 와서 나는 「빠리」의 밑바닥부터 훑어보는 순서를 택한 셈이다. 「네온사인」이 요란한 어떤 술집엘 들어갔다.
이외에도 점잖게 보이는 부인도 끼어있는 집이었다. 「삼팬」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무대에서는 음악에 맞추어 춤과 무언극이 벌어진다. 정식공연을 한다. 술집인데 극장에서처럼 숫제 「프로그람」이 있고 그 「프로그람」 속에는 「오케스트라」 지휘자 이름, 배우 이름 무용인의 이름까지 적혀있다. 공연내용은 대부분 관능적인 것이고 선정적인 것들이었는데 예술이라고 하는 포장지에다 잘감싸서 지속하게 안보이는 특색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여기서 화장실엘 갔다가 바가지를 썼다.
일을 마치고 나오려니까 「팁」을 받는 노인이 있다. 얼마를 이런 곳에서 내야하는지 알 길이 없어 지폐 한장을 내놓고 이런 돈이 되느냐고 했더니 『「매르시보끄(감사합니다)』하면서 받는다. 나는 내가 내준 돈이 100 「프랑」이었던 것을 뒤늦게 알았고 그 본의 가치가 우리나라 돈으로 5천원돈에 해당하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50원정도 주면 되는 것을 이렇게 후한 돈을 주고 내가 술집의 화장실 풍속을 익할만큼 돈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니어서 저으기 배가 아팠다.
그러나 그때 그러니까 9개월전에 화폐개혁이 있어서 불란서에서는 옛 「프랑」과 새 「프랑」 돈이 함께 쓰여지던 때였다. 돈의 가치가 1백분지 1로 지하된 때라 동행한 친구가 『신형! 거 낸 돈이 새 「프랑」이요? 옛 「피랑」이요?』 하고 묻는 것이었으나 사실 나는 그 분별도 할 수 없었던 때였다. 그러나 나 자신의 위안으 위해서 『아 그 돈이 틀림없는 옛돈이었어』하고 속상한 내맘을 달랬다. 허지만 지금도 난 그돈이 옛날돈 100「프랑」인지 새돈인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옛날돈으로 생각하는 것이 지금돈 1「프랑」에 해당되니 적당한 「팁」을 준 것이 되고 해서 마음 편하다고만 생각하는 것이다.
거리에 나왔다. 밤구경을 하자고 어슬렁 어슬렁 밤거리를 걸었다.
『시간이 어떻게 됐죠?』하고 묻는 아가씨가 있다. 밤아가씨란다. 순경이 그 옆에 서있는데 관광객들의 손을 끄는 현행범이 아닌 바에는 잡지를 못한단다. 이들이 잡히면 이틀간 구류처분 당하고 수녀원에 맡기어 선고한다는 얘기였다. 수녀원들의 생활 속에서 무엇인가 느끼게 하고 감동을 받게끔 하는 선도 방법도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