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北統一 문제는 南北分斷에서 시작되었다. 이 비극적인 분단은 美소 양대 세력이 세계정책에서 빚어진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에 있어 이 사실의 원인을 따지거나 그 책임 소재를 추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남북통일 方案에 대해서는 「UN」總會에서 「즈네브」協定에 依한 「UN監視下 人口比例에 依한 南北統一 總選擧 實施」라는 大原則을 年中行事처럼 再確認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共産陣營의 反對로 아무런 效果를 거두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나마도 每년 되풀이 해두는 것이 우리측의 큰 勝利나 되는 것처럼 생각한 나머지 「UN」 총회에서의 그 支持표수 획득에 死力을 경주하고 있는 樣相은 참으로 不可避한 浪費이며 免할 수 없는 슬픔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最近에 와서는 「UN」에서의 年例的 決議에만 依存하는 從來의 방식을 止揚하고 다른 獨自的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좋겠다는 提言도 있었으며 또 不遠한 장래에는 「UN」에서의 한국문제 處理方案樣相이 달라질 것이라는 觀測도 없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의 惰性作인 「UN」 一邊倒的인 方案만은 지양내지 그와 同時에 우리 자신의 立場에서 모든 可能한 방안을 모색함에서 「이니시아니브」를 가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오늘의 時点에 있어서 남북統一의 방안내지 展望은 무엇이겠는가?
첫째 方法論에 있어서는 크게 나누어 平和的 방법이냐 懋力的 手段이냐? 우리는 단연코 평화적 방법을 택해야 한다. 北傀는 6·25 南侵으로 武力에 依한 統一을 企圖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失敗하였다. 平和통일이라고 해서 無防備狀態로 있겠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6·25의 再演을 막기 위해서는 萬全의 防備가 있어야 한다. 어느 意味의 和戰兩樣)의 統一態勢를 갖추어야 한다고 主張하는 바이다.
둘째로 統一體制에 關한 문제, 즉 民主主義로 統一하느냐 共産主義로 統一되느냐 그렇지 않으면 中立主義로 統一됭야 하느냐의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는 오직 民主主義體制로 統一한느 것만이 우리의 念願인 것이다. 共産主義는 다시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中立主義路線으로 妥協해서라도 民族은 統一되어야 하고 또 그것만이 可能한 것처럼 觀望하는 人士가 없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그 所謂 中立主意란 것은 곧 共産主義에로 넘어가는 징검다리에 不過하다는 사실을 몰각함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는 또 소련이나 中共이 世界後進地域에서 그들을 책동하여 中立路線을 채택케 함에 血眼이 되고 있는 사실을 부러 看過하는 것이다.
다음은 統一時期의 展望, 즉 언제쯤 統一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통일에 대한 초조한 심경을 가진 사람들은 世界第3次大戰을 統一의 時期로 내다보고 또 그렇게 되면 美國의 勝利로서 우리의 民主的統一을 이룩할 수 있다고 期待 한다. 이러한 展望이 가장 素朴하고 單純하며 동시에 지극히 상식적인 韓國사람의 大部分을 차지하고 있지 않는가 推側된다. 이러한 3次大戰待望論이 비록 非倫理的이기는 하지만 절대로 適中되지 않으리라고 斷言할 수도 없지 않을까? 그러나 이러한 見解는 他律的이고 自_的諦念에서 나오는 所致에 不過한 것이고 우리는 어디까지나 自律的이면서 恒常 世界情勢의 _移에 適應하는 姿勢로서 平和的 방안을 摸索해야할 것이다. 그러므로 統一의 時期를 豫定하는 것은 急轉하는 國內外情勢에 비추어 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來日이라도 統一時期가 닥쳐오리라는 想念下에서 꾸준한 討論과 硏究를 거듭하여 國論의 統一된 獨自的統一方案이 恒時 미리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마치 인자가 언제오실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예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루까 12 · 40).
近者에 發表된 바에 의하면 『經濟的條件이 北傀에 比해 有利한 時期 즉 1970年後半期에 가서 統一問題를 論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는 要旨의 見解가 表明된 바 있으나 이는 統一의 具體的 可能時期를 測定함에는 一理가 있을 것 같으나 統一方案을 論議하는 그 自體를 그러한 期点까지 延長한다는 것은 앞에서 論及한 筆者의 見解와는 크게 距離가 있다. 뿐만 아니라 그 見解는 經濟的 與件에만 力点을 둔 感이 없지 않다.
나는 統一方案의 要素에 크게 세가질르 들고저 한다. 즉 經濟, 軍事力 그리고 思想의 條件이다. 經濟的으로 크게 發展되어 北傀圈下의 人民보다 더 유복하게 살 수 있다는 實證을 보여주는 것은 대단히 重要한 일이다.
또 軍事力으로서도 優勢하여 저들로 하여금 侵略의 機會를 엿보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一旦有事之時에는 敵을 壓服할만한 威力을 保有하는 것도 매우 重要하다. 그러나 이 두가지 要素에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重要性을 가진 것은 思想 즉 國民精神武裝에 관한 문제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民主主義思想과 反共理念에 徹底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로만 民主主義를 부르면서 實地는 그와 逆行하거나 입으로만 反共을 외치면서도 마음속에는 容共도 無妨이라는 程度의 미지근한 思想이 萬若 韓國國民의 一部에라도 남아있다면 對共鬪爭 내지 勝共統一의 準備는 完全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돌이켜보건대 現下 爲政當局이나 모든 政治人들이 經濟나 軍事問題에 대해서는 많은 關心과 精力을 기울이는 것 같으나 遺憾이나마 國民思想問題에 있어서는 그다지 重力이 加하여지지 않는 感을 느낀다. 共産黨이나 間諜을 索出嚴斷하는데는 勿論 贊成이다. 그러나 積極的으로 全國民을 反共思想으로 再武裝시킴에 있어서는 아직 遙遠한 感이 있다.
筆者는 이 点에 대해서 우리 宗敎人들의 指向할 바를 提示해 보고저 한다 反共思想의 武裝에 앞서 먼저 根源的으로 우리 民族의 고질적인 分裂性向을 뿌리뽑아야 한다고 强調하고 싶다. 우리 民族의 個體的 優秀性은 世界人이 널리 認證하는 바이나 同時에 韓國民의 團結精神의 缺乏性은 또한 世人의 共通된 빈축을 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와같이 團結하지 못하고 分裂만을 일삼는 이 民族性向을 外國人들이 가리켜 『한국사람은 個個人으로서는 「다이야몬드」와 같으나 한줌 쥐고 보면 모래와 같다』라고 풍자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스스로가 警覺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우리 統一을 期하기 위해서는 民族精神의 分裂에서 團結로의 歷程을 構築해야 하며 그리하여 團結에서 統一에로의 最終 「코스」를 달려야 할 것이라고 믿는 바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民族에게 그리스도의 思想이 普遍化 되도록 가진 方法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思想만이 우리 民族의 分裂思想을 團合思想으로 變革할 수 있을 것이며 또 그 思想안에 가장 徹頭徹尾한 反共思想이 自在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저 레닌으로 하여금 1個師團의 힘으로도 한사람의 神父를 當하지 못한다고 慨嘆케 한 것이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우리는 온겨레의 하루빨리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이끌어 그리스도의 思想으로 再武裝되는 날에는 分裂은 統一에로의 一路를 매진할 것이며 또 그리스도의 무리들이 熱心히 統一의 念願을 祈求할 때에는 延延 135「마일」, 넓이 4「킬로」의 鐵의 사슬은 틀림없이 풀릴 날이 오고야 말 것이라고 굳게 믿는 바이다. 마치 베드루 宗徒가 獄의 쇠사슬에서 풀리듯이. (宗徒行傳 12 · 7)
玄錫虎(前 國會議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