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란 말은 신앙을 위하여 생명을 희생한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희랍원어(源語)가 뜻하는 것과 같이 「순교자」는 참뜻으로서의 증거자(證據者)이다. - 오늘날의 교회용법을 따라 「증거자」라 하면 생명을 희생함 없이 일상생활에 있어 신앙에 충실했던 성인을 가리킨다. - 순교자들은 자기생명을 걸어 자기의 신앙과 초자연적 희망을 증거하였고 천주께 대한 사랑을 증거한 사람들이다.
저들은 무지하고 간악한 관리들 앞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경험계가 존재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 이 자연계를 훨씬 초월한 더 고차적인 현실계가 있다는 것을 초자연세계야말로 이 자연세계의 기원인 동시에 목적이라는 것을 증거하였다. 그리고 죽음은 우리 존재의 종말이 아니라, 도리어 더 고차적인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며 영원한 생명에로 이르는 입문(入門)이라는 것을 증거하였다.
저들은 자기들의 신앙과 희망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현세적인 재물이나 지위나 명예를 서슴치 않고 포기할 수 있었으며 어떠한 고문에도 굴치 않고 자연적 생명까지 희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순교자는 무엇보다도 사랑의 증거자이다.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요왕 18장 37절) 천주의 아들께서 『누가 그 벗을 위하여 제 생명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은 없느니라』(요왕 15장 13절) 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천상성부께 대한 사랑과 우리 인간들에 대한 사랑을 십자가 위에서 증거하셨다. 성바오로께서는 『우리들이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에 그리스도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대한 당신 사랑을 증명하셨느니라』(로마서 5장 8절) 하셨다.
천주님과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 사랑도 다를리 없다. 우선 종도들이 거의 다 자기 생명을 희생함으로써 스승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증거하였고 「로마」 박해시대에 무수한 신자들이 이렇게 증거하였고 그후 복음의 씨앗이 떨어지는 곳마다 이와같은 사랑의 증거자들이 속출하였다. 우리 한국 복자들도 다 이와같은 사랑의 증거자들이다.
도대체 참된 사랑이란 어떤 형태의 것이든 자신의 완전한 봉헌을 함축하고 있는 모양이다. 남편을 열렬히 사랑하는 열녀(烈女)나 어버이에게 대한 사랑이 극진한 효자, 효녀, 효부나 국가에 대한 충성이 지극한 충신들은 다같이 자기 사랑의 대상을 위하여 생명을 희생하였던가, 봉헌할 각오를 가졌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랑의 대상을 위한 희생으로 자신을 바치는데 삶의 보람을 느꼈다. 뿐아니라 이때에 제일 행복했을 것이다. 또 사람들은 이들을 장하다고 극구(極口) 찬양한다. 사람은 결국 사랑을 증거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또 사는 것이 아닐까? 반드시 피를 흘리지는 앉는다 할지라도! 그러나 물론 무가치한 사랑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무가치한 인생을 산 사람들이다.
참 뜻으로 어리석은 자들이다. 순교는 어떤 피조물에 대한 사랑의 증거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며 모든 선의 근원이시며 모든 선의 근원이신 천주께 대한 사랑의 증거다. 어떤 사랑하는 피조물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며 찬양할만한 것이라면 절대적 선을 위하여 자신을 봉헌하는 것은 얼마나 장한 것이며 지혜로운 일이랴! 형이하적(形而下的)인 것 밖에 모르는 자들에게는 순교자들이 어리석은 자들로 보일 것이나 천주의 백성은 『저들의 지혜를 이야기하고』 저들을 기리 찬미하리라(집회서 44장 · 15정 14정)
요셉 피렐 신부는 그리스도 신자라 함에는 「순교」 즉 피로써 자기의 신앙을 고백할 각오가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그것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사악(邪惡)한 이 세상은 「빛을 미워하니」 말이다. (요왕 3장 20절)
바오로께서도 『무릇 그리스도 예수안에 신심있는 생활을 하고저 하는 자는 다 박해를 감수인내(甘受忍耐)할 것이니라』(티모네오후서 3장 12절) 하셨다.
자기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서있는 사람만이 즉 순교의 정신을 가진자만이 참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崔昌成 신부(성베네딕도회원 경북 칠곡본당 주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