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성토요일(망예수부활) 경문에서 『오 복된죄여! 그처럼 위대하시고 그처럼 착하신 구세주를 우리에게 주셨음이로다』라고 노래한다.
이 구절은 원죄를 두고 하는 말이다. 교종 바오로 6세께서 7월 11일 「로마」에 모인 몇몇 신학자들에게 이 구절의 전통적인 의미를 재확인했다.
인류의 첫번째 과오였던 원죄로 인해서 그리스도가 구속사업을 하시게 되었다는 사실을 명석하게 아는 사람이라도 아담의 죄가 복되다는 말을 이해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가장 미소한 죄라도 최대의 선에 의하여 무마되지는 못한다. 그리고 원죄가 인간의 본성 속에 파놓은 악의 심연(深淵)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원죄의 악성을 완전히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죄를 없애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보내주신 천주님의 양선하심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죄가 행(幸)이 아니라는 것은 교회의 교리다. 이 교리는 「까르타고」공의회와 「오란즈」공의화와 「뜨리덴띠노」공의회에서 정의되었으며 교종도 죄에 대해서는 그 정의만으로서도 충분하다고 말한 바 있다.
교회가 정의했듯 원죄는 결코 밝은 것이 못된다. 비록 인간의 원죄로 말미암아 죽음과 고통을 면치 못하고 인간의 본성이 지닌 모든 능력의 충만함과 조화를 상실하여 지상에서는 다시 회복할 수 없게 되었지만 원죄의 교리는 한걸음 나아가 구속사에 연결된다. 원죄의 교리를 모르고서는 그리스도가 이룩하신 구속의 신학을 알지 못한다.
한마디로 원죄는 인간을 현실에다 묶어 놓는다. 왼죄는 우리가 어디서 행복을 추구해야 할지 가르쳐 주고 안전과 평안이라는 특별한 의미의 행복을 매일 누리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원죄로 인하여 십계명이 필요했고, 원죄로 말미암아 행복이 범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이 어떠한 교육제도나 정부형태에도 완전히 자신을 내맡기지 못하는 이유도 원죄때문이다. 원죄가 있기 때문에 기도와 성사를 통한 천주의 도움이 필요불가결하다.
또한 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 스스로 완전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거짓 낙원을 인간의 자유와 교환하려는 사람들을 믿지 않게 되었다.
고통, 죽음, 무식 등 여러가지 원죄의 결과가 항상 인간과 더불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역경에 처해있을 때 실망치 말고 세속것은 지나치게 추구하지 말 것이며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지상선(地上善)을 추구하기 위해 점진적 발전을 거듭해야 한다는 것을 이같은 원죄의 교리에서 배워야 한다.
원죄의 교리는 실망의 교리가 아니고 희망의 교리다.
【外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