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敎實話(전교실화)] 길 잃은 양을 위해 (8) 단돈 70원에 運命(운명)을 바꿔 ①
발행일1966-09-18 [제535호, 2면]
이세상에는 슬픈 이야기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 그렇게도 슬픈 사연을 남긴채 몇방의 총성과 함께 덧없이 사라져 간 사형수를 회상 할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씻을 수 없는 쓰린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5506번 韓東雨(1938년생)
그는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기암리 409번지에서 한기원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11살 되던 1950년, 6·25 사변이 일어나자 어떤지방 빨갱이의 밀고로 양친은 괴뢰군에 의해 무참히 피살당하고 말았다. 그는 두 어린 누이동생과 함께 붙일 곳 없는 고아가 되어 이때부터 인생의 갖은 쓰라림과 학대를 겪게되었다.
갈 곳 없는 이들 3남매는 간신히 그 마을에 있는 외갓집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고 누이들을 위해서는 그 자신 어린나이로 있는 힘을 다해 농사를 돕고 일했으나 날이 갈수록 어린가슴에 말할 수 없는 슬픔만이 쌓여갔다. 그는 일하는 틈틈히 혹은 계절이 바뀌는 어느 쓸쓸한 들녘, 외로운 동산 위에 앉아 남몰래 얼마나 눈물을 흘렸던가.
이렇게 어린 가슴에 풀길없는 원한이 맺히고 쌓인채 어느덧 그의 나이 21세가 되었다. 1959년 어느날, 그는 멀리 읍내로 향하는 길에서 돌아설줄 모르고 곧장 따라오며 걷잡을 길 없이 눈물을 훔쳐대는 두 누이동생을 달래다 못해 꾸짖다시피 남겨둔채 군에 입대하고 말았다.
제12사단 37연대에 근무중이던 3년째 되던 1962년 4월 28일, 자나깨나 잊지 못하던 두 누이의 눈물짖는 모습을 그리며 하루동안의 외박허가를 얻어 총총히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반가움과 쌓인 서러움에 복바쳐 눈물로 맞이하는 어린 누이들과 만나 그들을 위로하고 달래 보기도 했으나 그들의 고생을 당장 덜어줄 길도 없이 그는 답답한 가슴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한시간만 한시간만 더… 고생에 지친 누이동생들을 차마 뿌리칠 수가 없어 엉거주춤 앉았다가 그는 뒤대 시간마저 놓쳐버렸다. 돌아가 보아야 상관에게 사정없는 기압을 받을 생각을 하니 두렵고, 이렁저렁 그는 영영 돌아갈 결심을 못하고 말았다.
이젠 군의 규율을 어긴 몸.
붙들리는 날이면 혹독한 형벌을 받을게고-. 그런데 이 큰 고통과 이 큰 불행은 누구 때문인가? 이렇게 되어 주위의 눈을 피하며 은신배회하던 중 그해 4월 어느날 아침.
충청북도 청원군 불인면 소재 속칭 새티고개에서 마침 대신 방면으로부터 흰옷을 입고 보따리를 머리에 인 한 여인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그 여인을 본 순간 그는 전부터 6·25 당시 그가 살고 있던 부락과 인접해 있는 그 여인의 부락에 주둔하고 있던 인민군들에게 밀고되어 자기 양친이 피살되었다는 사실을 같은 부락민들로부터 듣고 지금까지 반신반의해오던 중 양친살해의 경로를 그 부락민인 이 여인에게 묻고 싶었다. 그때 그 살해의 현장에 이 여인도 혹시 있었던게 아닌가 그런 생각에서 그는 여인에게로 다가가 그 당시의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그걸 내가 어떻게 할겠노, 말이다. 응? 원 세상에 별일 다보겠네. 듣자하니 네가 누구한테 함부로 그런 소리를…』
그 여인은 눈을 부릅뜨고 다짜고짜 신경질을 부리며 악을 쓰더란 것이다.
그는 슬그머니 울화가 치밀었다.
『무라구요? 여보시오 당신 그렇게 성낼 것까지는 없지 않소.』
『아니 - 무엇이 어쩌고 어째?』
『뭐요 정 그렇게만 할테요 나도 성질이 나면 보토인줄 아오. 그렇게 성내봐야 피차에 재미없오 좋은 말로 물을 때 발리 대답이나 하시오』
『그래 좋다 어디 너 좋을대로 해 보렴』
그 여인은 이젠 묻는 말은 들은 척도 않고 가려고 했다.
그럴수록 그는 오늘이야 말로 그 진상을 기어코 알아내야 겠다고 생각하고
『여보시오 말이나 좀 하고 가시오. 사람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거요?』
그는 핏대를 세우고 여인의 오른쪽 팔을 붙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