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한국) 招待(초대) 敎會史(교회사)의 近代化(근대화)에로의 寄與(기여)
人生觀(인생관)·社會制度(사회제도) 등
儒敎的(유교적) 傳統(전통) 思想(사상)의 배척에도 革新(혁신)에 貢獻(공헌)
神學(신학)이 科學技術(과학기술)로 受容(수용)됐으나
韓國初代敎會史는 西勢東漸-東方航路의 發見에 따라 온 예수會의 新天地에의 傳敎의 延長이었고 韓國에 敎會가 成立되는 18世紀末葉 前後의 事情에서 본다면 儒敎的 傳統社會에의 一面的 排戰이었다. 그럼 韓國의 敎友들이 自律的으로 敎會를 組織하고 信仰生活을 營爲하던 時期를 일러 韓國敎會史上 「初代」라고 規定하겠으나 實質的으로는 李承薰이 北京에 가서 領洗를 받은 1784年무렵을 中心하여 活動의 內幕이 比較的 또렷이 알려지는 1801年 辛酉敎難까지를 아마 初代敎會史의 範疇라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規定에는 事實에 根據하여 各己 見解가 區區할것이나 壬辰前後하여 明末의 中國社會를 通하여 傳來된 西歐文物과 그에 대한 知識으로의 理解 乃至 精神面에 대한 儒敎思想과의 比較-檢討, 이어 그 優位性의 認定에 断을 내린 星湖 李익(嘯英時代) 같은 急進的思想家의 科學的態度를 보게 되며 그를 中心으로한 南人學派의 學人들이 西洋科學(中世-가톨릭的乃至 文藝復興期의 科學)에 關한 理解 談論 또는 書信으로 論議한 것을 볼때 이미 그들에게 儒敎思想 또는 中國의 傳統的 古典科學만이 自己들의 知識世界에 있어 唯一한 것이 아닌것을 우선 깨닫게 되었다. 李익과 論談한 安鼎福 愼俊담 吳錫忠 등을 보겠으나 實際로는 보다 여러 사람이 西洋科學 理解에 參與하였음은 當時 南人學派는 물론 反對派인 老論學者들도 實用的인 보다 새로운 學技術로써 西洋科學에 興味를 갖고 알아보려고 努力했었다. 李이命 洪大容 朴趾源 뿐아니라 肅宗때의 李긴 같은 이는 宋學의 자리에서 西學的 宇宙觀을 批判도 하였다. 當時의 이러한 氣風은 初代敎會의 主要人物을 異端視하는 出發点도 되었으나 時代潮流로는 實際的인 面에서 다루어질 傾向이 濃厚하였음은 龐迪我의 「泰西水法」 같은 것은 李익 같은 이는 國家政策改革에 있는 重觀할 것을 指示하는 한便, 湯若望 「主制群徵」 같은 冊子에 담긴 知識은 實質的으로 가톨릭神學으로 다루어져야할 것이 오히려 그中의 自然觀 乃至 그 知識이 科學으로 直輸入되었음은 이제와서는 學的인 자리에서 再批判되어야할 것이었다.(아직도 「主制群徵」을 科學知識의 面에서 보려 하지만 보다 神學的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뿐만아니라 프토레마이오스의 天文略이 轉寫 利用되었는가 하면 보다 傳敎精神에서 成冊되었던 畢方濟의 「職方外紀」도 中國以外의 世界知識의 理解에서 筆寫 利用하기에 이르렀음을 볼때 가톨릭信仰의 傳來와 함께 能動的이든 被動的이든 西洋文物의 傳來가 敎를 信奉하는 校友에게는 물론이었겠지만 18世紀以後의 우리 學人들에게 새로운 知識의 傳授者이었던 것이다. 一部에서는 信仰과 關係없이 科學-技術의 새로운 것으로서 中國것에 比해 보다 實用的이고 合理的임을 알고 實用化에 努力했으며, 또 一部에서는 信仰과 함께 그 知識을 受容實用하였으며, 또 다른 面에서는 科學知識에서 信仰으로 推移됨을 보여주었다.
말하자면 韓國初代敎會는 위에서 말한 知識 零園氣 속에서 形成되었다. 이러한 精神狀況에서 初代敎會의 指導的인 人物들은 精神과 知識面에 있어 傳統的 儒家-官僚的인 人群에 比하여 合理的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例컨대 權日身이라든지 李벽같은 사람은 西學(科學-信仰)을 自己의 精神基盤으로 잡았으나 함께 그들은 當代를 代表할 經學者이었으며 李벽같은 이의 短片的인 말마디에서 보더라도 經典解釋에 新生面(民本的인데서 愛人的인데로의)을 열었음은 丁若鏞이 讚嘆한데서도 볼수 있다. 이러한 精神은 18世紀末葉의 改革的 君主 正祖에 依해 實踐에 옮겨질려 했으나 政治的인 反對派 老論을 中心한 群派一群에 의해 挫折되었다.
反對派에서는 儒家倫理에서 가톨릭信仰을 彈壓하기에 集中的이었으나 그들의 指標가 政이 政治一線에서 南人學者(西學信奉)를 몰아내는데 있었으므로 함께 西學的知識의 萎縮을 謀免키어려웠으나 科學-技術의 實用性을 注視하는 一群의 學人들에게서 部分的이나마 西學的 知識의 拂拭은 뜻대로 되지 못하였으나 이것의 社會的인 展開 乃至 그것을 基盤으로하는 西歐近代文化의 受容基盤의 마련을 위한 準備의 機會들 喪失케 하였다.
허나 西學에 있어 가톨릭神學 또는 哲學의 受容이 儒敎的인 傳統에 대하여 보다 새로운 世界를 韓國人에게 알려주었으며 더욱 「天主와 나」를 생각하는데시 儒敎에서 「君主와 나」라는 생각에서 보 다 人間으로의 自己를 認識하게 하였고 이어 「人間」을 같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오늘 우리들이 따지는 程度의 것이 아니라 퍽 單純하게 생각하는데서 儒敎社會의 身分的階層意識을 깨치게 되었고 敎友들의 生活에 있어 實踐되었음은 兩班·中人·賤人들이 같이 敎友로서 사귀게 된데서 볼수 있다. 이러한 社會的인 關係 交涉은 李氏朝封建制社會에서는 敎會에서만 볼 수 있었던 일이다. 이러한 事態 兩班爲政者(유교적 官僚群)들에게는 封建的執權體制에의 一種의 큰 挑戰이었던것이다. 初期 廢祭祀를 가지고 問題를 삼았던것 보다 더 威脅的인 事實이었다. 一面 이러한 事實은 執權層이 固執하는 社會體制를 分化시킬 要因이었다. 西歐에서는 웨버의 말대로 「프로테스탄티즘」의 倫理가 資本主義精神을 배태케 하였다. 하지만 韓國에 있어 初期 「가톨리시즘」의 傳來에 따라 일어난 이곳의 傳統社會에의 刺戟 桃戰的 一面은 韓國에 새로운 社會로의 움을 트게 하였다. 初期에 있어 趙某라는 信徒는 같은 敎友로서 自己집 종(奴)과 질녀와 혼인까지 하였던 事實에서 새로운 世界로의 길을 열 수 있었던 이들이 初代敎會의 信徒들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 一例는 反對派에서 造作하지 않았나 하는 疑問도 있으나 確實히 傳統社會에의 桃戰, 新知識, 보다 合理的인 생각은 近代化의 길을 말 할수 있었다.(이 課題는 韓國初代敎會史의 보다 치밀한 硏究에 期하여야 할 것으로, 小稿의 未熟함을 讀者에게 謝하는 바이다.)
洪以燮(延世大敎授·韓國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