紀行文(기행문) 殉敎先烈(순교선열) 遺址(유지) 踏查(답사) (3)
洪儒漢(홍유한) 公(공) 등의 初代教會(초대교회) 史料(사료) 發見(발견) 榮州(영주) 두메山(산)골서
崔南殉(최남순) 教史(교사) 編纂(편찬) 위해
발행일1965-09-26 [제488호, 4면]
영주는 역시 15·6년전에 한번 지난일이 있었다가 그간 몇해전에 큰 수해를 겪고 경북 북부지대의 도시로 발전시킨다는 경북도의 방침 등을 신문을 통하여 알았지만 막상 이번에 와서보니 그야말로 새로운 도시의 면목을 갖추어가는 현상임을 보았다. 금강여관(金剛旅館)에서 여장을 풀고 피곤한 노구(老軀)를 하루밤에 잘 쉬었다. 아침에 주인에게 단산구구리(丹山九九里)를 물어 찾아가기로 나섰다. 먼저 우리 본당신부의 소개편지를 전하려 영주본당을 찾았더니 포항 수녀원출신 수녀 두분이 맞아준다.
본당 신부에게 안내되어 편지를 전하였더니 본당 배신부(裵·佛人)는 수녀들에게 요며칠 전에 교무(敎務)로 한번 갔던 그 동리가 아니냐고 묻고, 바루 어제날짜로 제천(提川) 성모수녀원 지도신부인 주재용사(朱在用師)에게서 나온 것을 짐직하였다. 이곳 단산면 구구리의 사건은 대체 무엇이길래 사방에서 의뢰가 있고 지금 내가 찾아온 것인가? 독자 여러분은 궁금하리다. 거기는 순교선열의 유지가 있는 곳도 아닌데 무엇을 찾는 것일까. 독자제위여, 다만 기뻐해 주십시요. 우리 한국 천주교수입은 세계 가톨릭사상에 둘도없는 특색인 것임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이곳 단산면 구구리(丹山九九里)에 살다가 이로부터 1백30년 전(즉 조선천주교 창립되던 그해 정월에)에 주의 품에 선종한 홍유한(洪儒漢) 공에 대한 사료(史料)를 찾은 것은 영남 순교사의 첫 「페이지」를 금백(金帛)으로 수(數)놓을뿐 아니라, 우리나라 교회사에 조금 말이 있는 그분의 자세한 내력을 알게되어, 금상첨화(錦上添花)의 사료를 밝힌것이 통쾌하고도 자랑스러운 일 그것이다.
공이 성호선생 문하에서 「천주실의」와 「칠극(七克)」 두권의 교리서를 얻어보고 즉시 신앙 실천을 위해 소백산(小白山) 아래 깊숙한 산골로 숨어들어 남은 평생을 오로지 신앙과 수덕으로 마쳐 열세(熱洗=火洗)로 선종한 사실은 세계 가톨릭사상(史上)에서 찾아 볼수 없는 우리 조선만이 지닐 수 있는 긍지(矜持)의 역사적 장거(壯擧)인 것이다.
그분의 자세한 내력과 신앙 실천의 실황과 그에 대한 여러가지 문헌은 여기에다 밝힐 수 없고 다음 다른 출판물에나 또한 불원 발간될 「영남순교사」에 자세히 실리겠기에 약하고 오직 그에 대한 문헌을 찾은 극적(劇的) 장면을 소개하련다.
나와 수녀들이 그곳을 찾아가려는 의논이 분분한대, 백신부님이 나도 가고 싶소, 그러면 부정기(不定期)한 합승을 믿을 수 없으니 내차로 갑시다 하고는 부리나케 달려가서 자가용차를 끌어내어 발동을 하면서 모두를 타라고 한다. 우리 일행 네 사람은 희망에 부풀은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미지(未知)의 역사지(歷史地)를 향해 간다. 시오리를 겨우가서 그리 넓지않는 내(商峴川)에 이르렀다. 그리 깊지는 않으나 모래만 깔려, 차가 지나가기가 좀 곤란할 것 같았다. 신부님은 가봅시다 하면서 차를 내몰았다. 예측과 같이 그만 차바퀴가 모래속에 깊이 박혀 요지부동이었다. 수녀들과 내가 다리를 둥둥 걷고 차채를 밀었으나 우리의 필사적 위력(偉力)이 자동차에게는 코웃음거리밖에 안되는지 꼼짝달싹도하지 않는다. 그때 장군들이 많이 내를 건느고 있기에 응원을 청하였더니 그들 중 6·7명 청년들이 달려들어 차채를 거의 들다시피하여 모래에서 빼내어 주었다.
제1차 난관은 이렇게 벗어나서 또 다시 차는 벼논의 푸른 물결을 해치며 신명나게 달리다가 제2의 난관인 내(川)를 또 하나 만났다. 그러나 돌자갈이어서 무사히 통과하였다.
목적지를 10리 가량 남겨두고, 어떤 노파의 노파심으로 하는 말을 굳이듣고 능히 갈만한 차를 농협(農協) 사무소에 맡기고 도보로 구구리(九九理)를 찾아갔다. 다행히 그 마을 동장이 홍씨라기에 즉시 그를 찾았다. 홍동장은 우리를 자기 큰댁으로 인도하여 우리가 요구하는 족보와 문집 몇가지를 친절하게 보여준다. 대분밖에는 양인과 색다른 보살(修女를 그들이 그렇게 부른다)을 구경하러 모여드는 구경군의 주시하에 나는 족보를 뒤지다가 홍유한(洪有漢)이란 분을 발견하기는 했으나 자(字), 호(號), 생월일 사망년월일, 묘소소재지 등의 기사가 없어 매우 안타까이 생각하였다. 다른 문헌을 대강 상고하여도 우리가 찾는것과는 거리가 너무 먼 것들이었다. 동장은 젊어서 전연 모른다 하고, 그댁 주인은 마침 장에 가고 없었다. 그 주인이 없어서는 안될일이기에 그댁에서 지어주는 점심을 먹고 나서 신부와 수녀들은 돌려보내고 나혼자 남아서 주인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어두워서 주인이 돌아왔다. 그는 홍목유(洪穆裕)라는 분인데, 오래 은행가로서 근무하다가 정년퇴직(停年退職)하여 은퇴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그의 전부인이 교우로서 사망하고, 천주교를 믿고 수녀가 되고싶어하는 전실의 딸과 후처 몸에서 여러 자녀를 가진 노련한 사교적 인물이었다. 저녁을 나누면서 홍유한 공의 이야기와 천주교에 대한 설화로 밤이 늦도록 꽃을 피우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주인이 일어나더니 자면서 생각하니 이웃 마을에 풍산(豊山) 홍씨 한집이 사는데 그집 6·7대 조의 이름이 홍유한(洪儒漢)이란 분이 있는듯 하다 한다. 이것이 천주의 계시가 아닐까! 아침을 먹고 그 집부터 가보기로 하였다. 구구리(九九里)는 옛날 구고(九臯)라고 불러, 「구들미」 「배나무실」 등 여러 부락으로 된 동리였는데 「구들미」가 홍유한 공이 처음 살던 곳이었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폐허가 되어있고 그 후손이 사는 곳은 「배나무실」이었다. 홍목유씨의 안내로 풍산홍씨 댁을 찾으니, 30여호나 될듯한 깊은 골의 동리였고, 모두 초가뿐인데 홍씨댁 대문과 사랑채만은 묵은 개와집이었다. 대문은 본시 대문으로 지은 것이아니고 홍유한 공의 조부 홍중명(重明)씨의 효자문이었는데 본시 「구들미」에 세워졌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는 효자문이었다. 지금은 효자문이란 액면이 걸려있다. 주인 홍정식(正植)씨는 유한(儒漢) 공의 6대 손이다. 마침 풍기까지 볼일이 있어 떠나려던 참인데 홍목유씨의 만류로 여정(旅程)을 연기하고 나를 소개하였다.
우리가 찾는 진귀한 사료의 보고(寶庫)가 바로 이집에 있었다.
몇해를 두고 찾던 이 보고는 영원히 매장(埋藏)될뻔 하였던 것이다. 족보로서 모든 사실을 정확히 알았고, 많은 문헌을 보고 홍유한 공의 내력과 신앙 실천과 특히 수덕에 대한 많은 찬사와 유한공의 친작 시부(詩賦)들과 그의 친지였던 권철신(權哲身)의 형제, 이기양(李基讓=모두 初代信者), 성호 선생, 안정복(安鼎福) 선생 등의 서간 50여장과 그 외 홍공별세 후에 친지들이 지은 추도문들이 있었다.
이제는 갈곳이 상주와 문경이었는데 여러가지 사정으로 뒤로 미루고 영주본당을 둘러 귀가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