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은 1년 열두달 모든 계절을 따라 하루도 빠짐없이 자연계의 미묘한 보화보다 비할데 없이 오묘하고 뜻깊은 가지가가지의 축일과 성절(聖節)과 성월로 가득차 있어 우리가 찬류의 세상을 지나 천상의 길을 걷는데 조금도 외롭지 않을뿐더러 모든 성인들과 더불어 교회의 영광과 환희와 고통을 같이 나누고 있다는 역사적 의식속에 항상 용기와 사랑과 광명의 원천을 찾는데 부족함이 없지만 그중에서도 한국치명복자 79위를 기억하는 첨례인 9월 26일은 우리들에게 특별히 뜻깊은 날이요 자랑스러운 날이요 가장 생생한 감회를 품게하는 날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그분들이 우리와 같은 동포이며 우리와 같은 땅에 살아왔고 다른 아무 이유도 아니고 오로지 천주를 사랑했다는 사실때문에 최후에 생명을 바친 우리들의 조상인 까닭일 것이다. 이렇듯 위대한 조상들을 가졌다는 것은 우리들의 더할 수 없는 자랑이며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치명까지 하신 분들의 혈맥을 이어 받은 우리들의 신앙은 참으로 고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해마다 9월달을 복자성월(福者聖月)이라하여 갖가지 행사가 각처에서 거행되고 성당마다 복자들을 향한 기구와 찬가가 그칠줄을 모르며 교회지도자들은 치명복자들의 덕행을 설교하고 순교의 정신을 계승할 것을 고창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과연 우리들의 신앙은 치명복자들의 거룩한 유혈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알수 없는 것이므로 고귀한 피의 댓가로써 얻은 것이며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 신자의 씨」라고 한 텔투리아누스의 말은 세계사적인 사실로서 명백히 증거될 수 있는 진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순교정신을 계승하는데 있어서 혹은 순교정신을 현양하는데 있어서 좀더 파고들어 생각해 볼일이 있지 않을가 한다. 한국천주교의 신심은 우리가 순교자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이 순교정신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생생한 영향력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교자들을 위한 기념관이나 기념탑을 건립하고 여러가지 행사나 출판사업을 통하여 역사적인 과거의 사실(史實)을 온세상이 다 알게하는 일은 가장 효과적이고 기본적이며 필요한 일일 것이다. 벌써 일세기가 흘렀으니 이미 많은 사업이 성취되어 있어야 마땅할텐데 아직도 뚜렷한 것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심히 유감스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한편 이러한 사적(史蹟)을 한바퀴돌리고나서 또는 역사책을 읽고나서 느끼는 어떠한 거리감 혹은 공백감은 어찌된 일인가 이것이 메워지지 않고서는 순교정신은 참으로 현양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물론 지금 이 시각에도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받고 생명까지 희생당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도 현실이다. 북한에 동독에 중공에 소련에 수없는 고난이 있을 것이다. 굳은 신앙을 가진 선량한 양들은 치명할 각오를 단단히 할 처지가 바로 우리 옆에 다가온 것도 같다. 하지만 생명을 바친다는 것은 최후의 일이다. 더구나 우리 뜻대로만 되는 일도 아니다. 우리가 할일을 이 최후의 각오를 가졌다고 자부하고 그 순간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요 순교지를 선택해서 찾아가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우리가 할일은 마지막에 가서는 치명까지 이를지도 모를 이 일상생활을 어떻게 뚫고 가는가를 생각하고 실천하는데 있는것이 아닌가 한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우리행동도 결코 다른 사람의 행동을 그대로 모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선한행동은 하나의 창작과 같은 것이어서 슬기와 사랑을 바탕으로 새로 창작하는 노고가 필요한 것이다.
순교는 마지막일이고 순교를 당할때까지 우리는 무엇인가 자기세대에 알맞는 일을 해야하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순교정신만 있으면 무엇이고 못할이 없다고 하지만 행동하려면 우선 무엇을 어떻게 행할 것인지를 발견해야 한다.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도의 씨라고 한다면 이씨에서 나오는 새싹을 훌륭히 성장하게 하는것이 순교자의 의지이며 그 정신을 계승하고 현양하는 길이 아닌가 한다.
그리스도의 적(敵)은 때와 장소에 따라 그 양상을 달리한다. 우리는 이 새로운 양상의 적을 인식해야 한다. 옛적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현대 세계의 질병을 보아야 한다.
「애국심」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고 「애국자」 없이는 나라가 어지러워진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애국」하는 방법이 옛날과 지금이 얼마나 달라졌다는가를 생각해보자 지금의 애국자가 반듯이 옛날의 충신이 아닐것이고 옛적의 충신이 그대로 현대의 애국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뿐아니라 나라를 위하여 생명을 바칠 열성을 가졌다하여 지나치게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애국행위는 오히려 사회를 괴롭게 하는일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요즘 본다. 옛날에도 그러했거니와 현대에 와서는 더우기 인간은 혼자만 잘살 수는 없다. 마친가지로 우리는 혼자만 선을 행할 수 없고 혼자만 천당엘 갈수 없다. 지금 「바티깐」에서 열리고 있는 공의회도 만민의 구원을 위해 현대세계에 적응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현대에 있어서의 교회의 사명은 세계를 단죄하는 것이 아니요 사랑과 대화로써 세계를 무신론자와 불신론자들 까지 포함한 현대세계를 구하려는 것이 그 정신인 것 같다. 순교정신을 현양하는 길도 이 방향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새로운 행동을 창조해가는데 노고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朴甲成(서울大學校 美大學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