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교회가 그러하듯이 한국교회 역시 현대적 변천에 직면해 있다. 이 시대 변천상은 개화(開化)의 강력한 충동과 더불어 멸망의 위협적 힘을 내포하고 있다. 현대의 표지(標識)가 그 긍정적 및 부정적 발전 가능성과 함께 더 뚜렷이 인식되면 될수록 한국민족 안에서 번영해가고 있는 교회는 그 진로(進路)를 더욱 밝게 인식하게 될 것이고 또한 그길로 매진해 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에 가능하기 위해서는 교회는 오직 천주성신에 의해 인도돼가야 한다.(로마서 8장 14절 참조)
순수 인간적 정신은 흔히 인성의 약함과 욕정에 흐려져 가치있는 것과 가치없는 것, 구원과 멸망, 선과 악을 언제나 확연하게 분간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런 대립적 양자(兩者)가 인간생활의 모든 면에 상호 인접(隣接)해 있다. 양자가 다같이 인간의 선택 대상으로 부여돼 있으며 그것은 오늘날 특히 강요하고 분비는 다양성(多樣性)과 신속성으로 나타나 있다.
한국의 큰 도시(都市)를 가보면 세계 어디서나와같이 변화가 벅차게 진행되고 있음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수백년 혹은 수천년 오랜 역사의 획일적 한국의 생활양식은 현대적 다원적(多元的) 세계의 새로운 양식에 의해 교체(交替)돼가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비록 여기서도 구라파에서 운위(云謂)된 바와 같이 『전통에서 잿더미를 파헤치고 그 속에 살아있는 불은 계속 피워가야 한다』는 말이 적용된다 할지라도 결코 유감스러운 사태라고만 볼수 없다.
온 땅에 충만한 주(主)의 성신이 이같은 발전에 처해있는 교회를 인도하시고 있다. 이 성신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교회안에 사시고 또한 그 안에서 구속사업을 이룩해 가신다. 이 그리스의 구원의 현의(玄義)를 현대인들에게 알기 쉽게 전달해야 한다.
아직 연륜이 얕은 한국교회에 있어서도 천주님의 말씀을 현대적 상황에 맞추어 전하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바로 이같이 정신적수준이 높고 종교적 요구가 강한 한국인들에게는 의외에 가능성이 크게 주어져 있다. 특히 정신적 공백에 신음하고 있다고도 볼수 있는 지식에 굶주린 청소년들에게는 천주의 말씀을 그들의 마음의 굶주림에 대한 해답을 줄수 있게끔 전달해야 한다. 만일 교회가 장차 현대의 급진적 발전에 있어 그 구원의 복음으로써 인간을 구하는 일에 성공하지 못하며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실존의 충족을 순수 현세적인 면에서 구하게 될 것이요. 또 결국은 발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교회는 결코 마치 현세적 가치에 적대(敵對)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어서는 안된다. 교회는 세계발전의 문제들을 외면할 수도 없고 외면할려고도 않는다.
요안 23세 교항께서는 그의 회칙 「지상의 평화」에서 그리스도신자들은 현대의 강력한 「다이나미즘」에서 소외(疎外)돼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오히려 우리는 누구나 할것없이 지금까지 한것으론 부족하고 생산부면, 노동운동, 교육, 협동단체, 문화촉진, 법률, 정치, 국민보건, 체육 등등 모든 분야에 더 적극적으로 또한 구체적으로 참여하는데 힘써야 한다고 생각해야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시대, 원자와 우수탐색의 길이 터지고 이류의 한없이 넓은 새로운 진로가 시작된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진로의 목적이 어디에 놓여있는지는 어떤 인간적 철학도 계시진리(啓示眞理)만큼 뚜렷이 말해주지는 못한다.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피조물의 의미의 본(本) 중심임을 증거 한다.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은…다 저(그리스도) 안에 조성되고 모든 것은 다 저로 말미암아 저를 위하여 조성되었으며 저는 모든것 위에 초월하시고 또 만물은 저 안에 존속(存續)한다』(콜로세 1장 16-17절)
이 목적에 관하여 수년전 작고(作故)한 자연과학자이며 신학자인 데이아드·더·샬뎅은 20세기의 「태양의 노래」라고도 불리는 「물질의 찬가(讚歌)」를 지었다. 『복되다 너, 위대한 물질이여… 너, 물질이 없었더라면 너의 도전(挑戰)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와 천주께 대하여 아는 바도 없이 태만하게 침체되어 유치하게 살아왔을 것이다. 너는 충돌과 결합을 주는 자다. 너는 반발하고 순응하는 자다. 너는 무너뜨리고 또 바로세우며 저항하고 풀어주는 자다. 우리 영혼의 수액(樹液), 천주의 손, 그리스도의 육체가 된 너 물질아, 나는 너를 축복 한다』
이 모든 적극적 현세긍정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또한 과도한 현세적 경향에서 오는 위험, 즉 권리욕과 이욕(利慾) 모든것을 산산조각 내고 피상화시키는 그런 위험에 대하여 언제나 경계해 왔다. 그리하여 인간에게 천주와 참된 인간생활을 위해 힘쓰는 여유를 주지않으려는 이 기술문명 발전의 격동 중에서도 교회는 천주께 더 깊이 의지하고 인간의 상호관계를 더 두텁게 하는 길을 제시할 수 있다.
한국교회발전을 함께 규정지우는 시대의 표지에 대하여 아직도 말할 수 있는 많은 것 가운데서 여기서 한가지만 더 지적하여 말하겠다.
극동인(極東人) 역시 고도의 발전을 이룬 홍보(弘報) 수단을 통하여 날로 더욱 깊이 전체인류의 발전과 관계를 맺게 된다. 여기에 교회의 더 큰 발전가능성과 의무가 또한 있다. 교회가 세계를 바라보고 이를 향해 분발하는 젊은 세대를, 그리스도께서 보시는 눈으로 보고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이해로써 이해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단지 개개인을 축복하는 것만이 아니요. 전체인류가족을 축복하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그리스도 신자들에 대하여서는 초대교회의 그리스도 신자들에 대해서와 같이 『보라! 그들은 얼마나 서로 사랑하느냐, 그들은 판자집에 살든지 혹은 일류 「호텔」에 살든지 노동자이든 지성인이든 동양사람이든 서양사람이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모든사람을 형제같이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돼야 할 것이다.
이 모든것을 감싸는 사랑은 천주의 자녀들이 창에찔린 그리스도의 성심에서 영세와 견진 및 성체성사를 받을때 받은 성신의 결실(結實)이다. 나는 이같은 사랑의 정신이 한국교회와 더불어 전체 한국민족에게 예수성심의 풍성한 은혜를 주게되기를 기원해마지 않는다. 이같은 사랑의 정신을 우리는 한 한국인 사제가 지은 기구문을 드림으로 구하자.
『예수 성심이여! 내 마음을 당신 마음과 같게 하소서! 내 마음도 당신의 마음처럼 그렇듯이 깊고 그렇듯이 감수적(感受的)이며 그렇듯이 모성적인 것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 마음이 오늘의 세계에 대하여 당신 성심의 연장(延長)되게 하소서. 피로한자는 안식을 병든자는 건강을, 고통을 받는이는 위로를 내 마음에서 얻을 수 있게 하소서!
또한 사랑을 잃은이는 사랑을, 희망을 잃은이는 희망과 참된 삶의 기쁨을, 내 마음에서 찾게되고 신앙이 없는이는 신앙을 이 마음에서 얻을 수 있게 하소서.
예수성심이여! 당신 성심만이 세상의 구원되시나이다. 당신 성심 안에 모든 인간 마음이 안위와 평화를 얻게 하소서!』
에델기스 修女(釜山예수聖心傳敎修女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