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알려지지 않은 교회사] 殉教者(순교자) 들은 어떻게 죽어갔나
軍門梟首(군문효수) 斬刑(참형)·絞首(교수)·陵遲處斬(능지처참)·杖殺(장살)·窒息(질식)·당근질·病苦(병고)·餓死(아사) 等(등) 갖은 方法(방법)·拷問(고문)으로
발행일1965-10-03 [제489호, 4면]
신앙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천주님과 가까이 있기 위해서 우리는 순교자들의 죽음을 묵상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면 우리 순교자들은 어떻게 죽었나?
난폭한 포졸들은 어떤 방법으로 그들의 목숨을 빼앗았나?
▲1785년부터 시작된 박해에서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도록 죽이는 방법이 모두 같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장소는 약간씩 달랐다. 신유박해 때에는 새남터를 많이 이용하였고 기해박해에서는 서울의 서소문 새남터 당고개를 많이 이용했고 병인박해 때에는 새남터와 절두산을 사형장으로 했다.
특히 외국인들은 새남터에서 사형했음을 알게 한다.
▲먼저 군문효수(軍門梟首)를 들수 있겠다. 목을 잘라서 목만을 장대에 달아 놓는 방법인데 머리가락을 여러 갈래로 갈라서 장대 서너개에 각각 달아매는 것으로 이것은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성직자들의 대부분이 군문효수를 당했다. 김대건 신부, 주문모 신부, 범주교 라베드루 신부, 끔찍끔찍한 사형법이다. 김대건 신부의 경우는 두귀에 화살을 꿰고 양쪽 겨드랑 밑에는 두개의 몸둥이를 깨어 넣고 앞뒤에서 걸머메고 군졸의 둥근진의 바깥쪽을 세차례씩이나 빨리 돌린후 꿇어앉히고 밧줄로 머리칼을 동여매고 그 한끝을 사형대로 쓸 말뚝에 뚫린 구멍에 끼어서 잡아당겼다.
▲다음에는 참형(斬刑)이다. 목을 칼로 쳐서 죽이는 것으로 끝난다. 이승훈, 정약종, 최필공, 홍낙민, 최창현, 과부 이아가다 부인 박안나, 이아오스딩, 부인 권발바라, 이요안 과부 김아가다, 이소사, 박애기, 김애기, 김업이, 많은 교우들이 참형을 당했다. 난폭한 포졸들은 한번에 목을 짜르지 않고 여러번씩 내려치는 것으로 순교자들을 괴롭혔던 야만성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은 교수형(絞首刑)이다. 8일간이 되어도 꿋꿋이 신앙을 죽음으로써 지키다가 30세에 교수형을 당한 홍교만(방지거사베리오)를 들수 있다. 이 방법은 어린순교자들을 죽이는데 사용했던 것 같다.
▲다음은 능지처참(陵遲處斬)이다. 이것은 머리, 몸, 손, 발을 사정없이 토막쳐서 죽이는 방법이다.
▲그리고 장살(杖殺)이 있다. 곤장으로 허리를 쳐서 죽이는 방법이다.
▲이밖에도 얼굴에다 백지를 몇갑풀씩 부치게 하고 물을 뿌리면 질식이되어서 죽는 방법 ▲또한 불로 지져서 죽이는 방법과 고문을 하고 굶기고 해서 옥사시키는 방법을 썼음을 알 수 있다.
60세된 이가환은 감옥에서 불로 지짐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리고 1791년 충청도 홍주 땅의 박노렌조는 볼기매맞기를 1천4백대나 했으니 얼마나 순교자들을 괴롭히다가 죽였는지 알게 한다.
번쩍번쩍한 칼날 앞에, 또 사정없이 후려치는 곤장 앞에 아픔과 두려움이 절대로 없는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죽음을 앞에 둔 순교자 앞에 나이어린 아들이나 딸이 나타나서 애원할 때에는 절로 마음 약해지는 것을 체험하는 순교자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끝끝내 예수·마리아를 부르면서 약해지려는 마음에 채찍질을 해가면서 즐거이 칼날 앞에 머리를 내어밀었다.
특히 기해년에 잡힌 교우들에게는 모두 족질이라는 형틀이 채워졌다고 하는데 길이 4m, 폭이 반m쯤되는 두쪽의 널판을 겁친것으로 아래편의 널판 한쪽에는 구멍이 뚫려 있어서 죄인이 거기에다 한쪽 발목이거나 두발목을 넣으면 윗편의 널판을 내리어 그 한쪽끝에 붙은 방아쇠를 돌리어 맞추고 다른 한쪽끝에 자물쇠를 채워서 죄인으로 하여금 꼼짝 못하게 하는 형틀을 사용했던 것이다.
이밖에도 많은 교우들의 옥사(獄死)가 있다. 심한 매와 꿂주림과 병고(病苦) 고문 끝에 감옥에서 숨져 갔다.
우리는 많은 순교자를 가졌으면서 복자위에 오른 분은 몇분 밖에 못된다. 애통할 일이다. 할수 있는 방법이 우리에겐 전혀 없을까. 특히 가냘픈 여교우들이 많이 치명하였다.
우리는 우리 선조들의 죽음을 묵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