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平生(평생) 藝術(예술) 遍瀝(편역)에서 祖國(조국)을 빛낸 安益泰(안익태) 兄(형)
故人(고인)이 남긴 말 偉大(위대)한 作品(작품), 神(신)의 靈感(영감)받아 大成(대성)
한사람의 위대한 예술가는 몇십명의 외교관 모다 낫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야말로 바로 천부적 음악가 고안익태(故安益泰)형을 두고 이른 말 같다. 일찍부터 조국을 빼앗긴 설움과 그리움을 안고 이역서의 피눈물나는 각고와 영광에 찬 예술 편역에서 그는 항상 조국과 우리민족의 얼과 정서를 그의 예술에 실어 이방에 전파했던 것이다.
이와같은 그의 사모치는 조국에 대한 애환은 그로하여금 예술적 정열을 더욱 고취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금인류역사 이후 오늘까지 인간의 마음속 깊이 느끼고 또한 염원하는 바는 언제나 예술을 통해 참된 인간의 꽃이 되며 향기가 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예술론을 피력코자 함도 아니요 다만 이러한 고귀한 예술이 이루어지는 그 원동력(原動力)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을 고안익태형의 생전의 예술 생애를 회고함에 곁들어 생각코자 한다.
동경 유학시절부터 그와 면학을 같이하는 동안에 그의 성격이 원래부터 강직하고 빈틈없을뿐 아니라 너무 올곧고 솔직해서 때로는 본의 아닌 오해조차 살때가 있었다.
그는 전공과목(첼로) 외에도 음악에 관한 여러가지 학술을 깊이 연구하여 그의 진지한 예술탐구와 그에 대한 집념의 자세는 일개 음악인이라기보다는 학자와 같은 모습이었다. 필자와 같이 여러번 음악회에 출연도 했으나 그는 연주곡목에 열중한 나머지 언제나 동료들과도 접촉을 피하고 있었다. 그는 건강한 편이 못되어 항상 자신의 건강에는 유의를 하였고 일상생활에도 빈틈없었으니 그는 한마디로 음악만을 위해 자신의 모든 신심정력을 기울였을뿐 아니라 그것을 성취할 소질을 담뿍 타고난 분이라 하겠다.
1930년 고안형은 동경 일본청년회관에서 도미송별독주회를 개최하였고 필자역시 같은해 동경을 위시하여 여러 곳에서 도미송별회를 가졌으나 불행히도 필자는 부정선인(不塣鮮人)이란 낙인으로 여권을 못 얻어 피차 동경에서 헤어지는 몸이 되었다. 그로부터 고안형은 그 예술 지향의 줄기찬 정력으로 오늘날 세계적 위치를 차지했던 것이다. 1962년 국제음악회를 열기 위해 32년 만에 그가 귀국하여 이곳 대구에서 재회했을 때는 피차가 너무나 감개무량한 나머지 말을 잃었었다. 당시 계성고교강당에서 그의 늙었으나 아직도 정열이 넘치고도 노련한 대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갖가지 옛추억에 잠겼던 일이 어제 같건만 그가 어느듯 유명을 달리한 것인가 생각하니 또한번 아쉽고도 무상한 마음 금할길 없다. 『위대한 자곡은 전지전능하신 신의 감화없이는 못 한다』고 하여, 3년전 내구(來邱) 당시 가톨릭시보 기자와의 회견에서 그의 예술체험을 통한 종교적 신념의 일단을 피력한 바 있다.
그는 또한 교회음악의 현대음악 내지 민속음악에의 대체에 이견(異見)을 표하고, 종교음악은 토착·민속에서 생겨난 고유음악(固有音樂)과는 다르다고 하면서 고전적 종교음악의 보편성을 주장했다. 그러므로써 그는 베토벤의 미사곡을 잘들어보면 인간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하고 미사곡은 곧 천주님의 「계시지」로서, 작곡가는 그러한 천주의 말씀을 풍부한 「인스피레이숀」을 받아 새기는 「메신자」라고 했다.
과연 위대한 예술작품이 이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바하, 헨델, 슈벨토, 모찰트, 같은 작곡가들이 신의 감화없이 그들의 작곡을 이룰 수 없었고 이런 모든 대가들이 으례히 미사곡, 즉 천주께 영광 돌리는 곡을 만들었던 것이다.
인간의 위대한 예술의 궁극목적은 천주를 공경하고 찬양하는 것이며 이러므로 신을 믿는 자에게든 안믿는 자에게든 결국 신에 영광돌린 예술은 그 자체 최고이며 그 정신도 최고이며 목적 또한 최고인 것이다. 고(故)리까르도 안익태씨는 교우도되고 나의 동지도되며 그는 비록 갔으나 그의 음악은 만인을 통해 영구히 하늘에의 찬미와 땅의 위로가 될 것이다. 원하옵나니 지금도 위대한 작곡가를 통해 지상에서 후세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염원이 천주께 통달케 하소서. 고인이된 리까르도 안익태씨와 고 요셉·윤용하씨의 명복을 빌어 마지않는다.
權泰浩(音樂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