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우리 안에서] 神父(신부)님들의 言辭(언사)
발행일1966-10-02 [제537호, 4면]
■ 信者의 意見
지나친 겸손, 오만한 말씨, 신부도 사회밖 존재 아닌데
여러 신부님들 가운데는 필요이상으로 말씀을 낮춰서 하시는 분, 즉 너무 겸손한 말씨를 쓰시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그와는 반대로 누구한테나 반말을 예사로 쓰시는 분들을 간혹 본다. 누구하테나 연령이나 친소의 구별없이 자기 비하의 말씨를 쓰는 경우, 이것은 겸손도 친절도 아니요 오히려 경원(敬遠)한 느낌을 주기 쉽다. 외국신부님이 한국말을 습득하는 도중 익숙하지 못했을 때라면 이해할 수도 있지마는 한국신부님이라면 그것이 겸손 같이 보이지 않고 남을 희롱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게되고 겸손하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그보다 더 곤란한 경우는 모조리 반말질을 하는 신부님이다. 교우들은 참을 수도 있다고 하자. 그러나 미신자인 경우는 다르다. 반말질을 받았을 때 적어도 예의를 모르는, 혹은 교만한 말버릇이란 악평을 면치못하리라. 한국말은 아이들에게, 어른들에게 또 동교간에 각각 다른 어법이 있다. 더우기 신학교를 갓나온 젊은 신부님이 교우들을 대할 때, 특히 노인, 부녀자 구별 없이 반말로 일관했을 때 아무리 착한마음을 가질래도 불쾌한 느낌을 금할 길이 없으리라. 돌아서서 하는 말이 『아무래도 신부님은 양반집 출신이라야 하겠다』고 하는 교우들의 말이 뜻이 있다고 하겠다.
교우들이라고 다 하인이요 천한 사람이 아니다. 채면도 있고 사회적 지위도 있다. 반말로 대했을 때 「신학적」인 것보다 앞서는 것은 「인간적」인 것이다.
신부님의 반말은 습관에서 오는 것 같다. 병고에 시달려 고통 중에 있는 환자가 젊은 의사를 보고 「선생님! 선생님』하며 겸비로운 태도로 대할 때 의사들은 세상이 다 자기 앞에 굽실굽실하는 것 같고 자기도 모르게 하늘에 올라 앉은 것 같다. 그래서 의사들이 반말을 잘 쓰는 것 같다. 신부님도 이런 경우와 같지 않을까.
더욱 놀라운 것은 아들 신부 앞에서 그 부모는 위하는 말씨, 아들은 반말을 쓴다. 언어도단이다. 신부님이라고 해서 그 사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신부님도 그 사회와 풍속과 그 제도 안에 사는 사람이다. 예법을 지킬 줄 알아야 사람을 대할 수 있고 사람을 대해야 전교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信者 F)
■ 神父의 意見
「모조리 반말질」이라니…? 추호의 이유변명 있을 수 없어
『모조리 반말질을 하는 신부님들』이 참으로 있는지 또 있으면 얼마나 만이 있는지 조사를 해보았으면 좋겠다.
『모조리 반말질』은 좀 과장된 표현이 아닐까? 이 표현이 과장이 아니라면 이 문제는 일반화된 문제가 아니고 몇몇 신부들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겠는가? 여하튼 「모조리 반말질」을 해서 신자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처음으로 대하는 미신자들을 실망시킨다면 대단히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태시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또한 천주께 계셨으니 말씀은 곧 천주시니라. …말씀으로 말미암지 않고 된 것은 도무지 없느리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도다』 천주님의 계심과 능과 사랑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표현되었었다.
「말」은 사람이 마음안에 든 것을 입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말」은 사람의 전체를 전인격을 표현하는 것이다. 사제는 그리스도를 안으로부터 방사(放射)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사제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진리를 알리고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하고 그리스도의 약속에 대한 희망을 줘야한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매력(魅力)을 지녀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주로 「말」로써 시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가 「모조리 반말질」을 해서 신자, 미신자들에게 불안과 격분과 경멸과 실망을 계속주고 있다면 그는 크게 잘못하고 있다. 어느 사제에게도 「모조리 반말질」할 추호의 이유도 변명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신자의 가정에도 때로는 약주를 과하 하시는 부친이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좋은 말씀으로 간한다. 여러차례 간해도 소용이 없다. 그러면 고치시도록 기다릴 수 밖에 없다. 고치시기 전에 돌아가시는 수도 있다.
사제의 「모조리 반말질」도 그렇다. 말버릇이란 즉각 고쳐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는 영영 못고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어찌할 도리가 없다. 마치 약주를 많이 하시는 부친과 같이 -
아래 몇가지 사실을 지적하겠다. 이것은 「모조리 반말질」을 변명하거나 정당화를 기도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그런 사제와 같이 살아야 하는 신자들에게 인내하는 힘을 주기 위해서다.
①어떤 사제의 「모조리 반말질」하는 이유를 캐본다면 그가 교회 내에 처해있는 지위나, 지니고 있는 권능이나,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기나 재산 때문에도 아니고 성품이 오만불손해서도 아니고, 『한국말에 아이들에게 어른들에게 또 동교간에 각각 다른 어법이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도 아니고, 사회의 관습이나 제도를 무시해서도 아니다.
추측컨대 신부로 출발할 때 말쓰기를 잘못 시작해서 그 잘못이 습관화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12년간의 기숙사생활, 그것도 배타적으로 학우들만의 상교(相交)에서, 사교(社交)의 시련이 전연 없이 일순간에 웃사람, 지도자가 된 그에게는 모두가 친한 동무 신학생 같이 보이는 것도 큰 무리가 아닐 것이다.
②사실상 사제의 직능이 그렇고 또 신자들이 「신부」(=영신의 아버지)님이라고 불러주고 하니 부지중에 그에게 부자의 관계이 「부」의 잠재의식이 생긴다. 이 잠재의식의 영향을 받으면서 조심없이 말하는데서 부지중에 그러한 말버릇이 생기게 된지도 모를 일이다.
③사제는 교회의 제도에 의해 프로테스탄이나 가식을 막론하고 친절과 사교성을 보이지 않으면 즉각적으로 사업과 성공에 반영이 되는 「서비스」 업자나 외교원과는 그의 직무가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잘못 들인 말버릇을 쉽게 깨닫지도 고치지도 못하는지 모른다.
④사실은 그리스도도 바리세이를 한테서 그들의 사회의 풍속과 제도를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을 받았었다.
⑤사제가 가진 「인간성」도 신자들이 가진 「인간성」과 마찬가지로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다. (C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