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敎實話(전교실화)] 길 잃은 양을 위해 (11) 단돈 70원에 運命(운명)을 바꿔 ④
발행일1966-10-09 [제538호, 2면]
그도 성호를 그으며 따라했다.
『앞으로 식사때나 취침전이나 항상 이렇게 성호경을 하십시요.』
『네.』
『그리고 천주님은 아무리 큰 죄인이라 할지라도 진정으로 자기의 죄를 뉘우치기만 하면 사하여 주시는 관용의 천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자기의 죄를 두려워 말고 매일 「천주님!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하고 기구하십시요.』
이렇게 해서 그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12단을 외웠고 계속하여 교리공부도 열심히 했다. 어느날 그에게 찰고를 했다. 성사의 종류 성체의 의이에 대해서 그는 거침없이 배운교리를 술술 외워 나갔다.
『삼위일체 교리를 비유를 들어 한번 설명해 보시오?』
『그것은 마치 한 인간 안에 지능과 의지와 정서(情緖)가 있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는 무엇이라도 물어보란듯이 자신 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 천주님이 존재를 믿나요.』
『네, 믿구 말구요. 확실히 믿습니다.』
몹시 춥던 12월 초순 어느 금요일날이었다. 그날 세종로성당에 계시는 박귀훈 신부님과 당시 서대문성당에 계시던 백 도밍고 신부님 이렇게 두 분이 오셨다. 11시경 교회당에서 미사가 끝난 뒤 박 신부님의 주례 하에 백 신부님의 조례로 나는 그의 대부가 되어 세를 주니 그의 본명은 바오로였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채 그는 긴 통회를 하며 끝없이 흐느껴 울었다. 박 신부님은 그에게 묵주와 공과책을 주며 조과 만과 드리기를 부탁하였고 나도 그에게 성모상본을 주었다. 그후 그의 손에선 교회서적이 떠나질 않았다. 「가톨릭교리」를 비롯하여 「생명의 곡」 「명상의 씨」 「젬마 갈가니」 「돈 보스꼬」 「성녀 데레사」 「성인전」 「東西의 彼岸」 「교부들의 신앙」 등 무려 70여권의 책을 탐독했다. 그중 「한국 79위 순교복자전」은 매우 감명이 깊었다고 말하며 만날때면 언제나 그는 나에게 죽음을 초월한 신앙에 대한 이야기만을 했다. 그는 매일같이 묵주신공과 성로신공을 드렸으며 때때로 깊은 명상에 잠긴듯한 그의 기도의 자세는 수의를 입은 수도자의 자세 그것이었다. 1964년 10월 14일, 역시 내가 대부가 되어 세종로성당 박귀훈 신부님에 의해 견진까지 받았다. 이와같은 신앙생활에서 어느정도 마음의 안정을 얻은듯한 그에게도 항상 떠나지 않는 애틋한 영상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의 이 범죄의 한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의 누이동생들이다.
그는 항상 나에게 말하기를 자기가 죽게되더라도 자기 누이동생들을 만나면 성당으로 인도해줄 것을 여러번 부탁했다.
『대부님 이제 무엇을 더 바라겠읍니까? 저의 마음은 평화롭기만 합니다. 그러나 이세상에 의지가지 없이 남을 누이들을 생각하면 차마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대부님 나중에라도 누이를 만나면 내가 천주님을 믿고 평안히 죽을 수 있었다는 것을 전해주시고 그들도 내 뜻을 받들어 성당으로 가라고 전해주십시오.』
그가 여덟번의 전방을 통해 2사하 21방에 있을 때이다.
1962년 4월 11일 일심판결에 사형언도를 받은 이래 이심 삼심 그리고 재심과 항고까지 모두 기각을 당하고 마지막 1965년 6월 14일 또다시 재심 청구를 해놓은채 그러니까 바로 죽기 3일전의 일이었다.
『대부님 교무과에 나가서 대부님께 꼭 할 이야기가 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