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제)2次(차) 大戰(대전) 難民(난민) 救護(구호)로 노벨 平和賞(평화상)탄 삐르 神父(신부)
사랑의 對話(대화) 위해 畢生(필생)의 努力(노력)
永遠(영원)한 理想(이상) 人間愛(인간애)로 貧困(빈곤) 打破(타파) 低開發(저개발) 地域(지역) 後援(후원)을
賞金(상금)으로 平和(평화)의 大學(대학) 設立(설립) 「人類(인류) 한품안에」 運動(운동) 꾸준히
1958년 12월 10일 영하 7도의 차거운 날씨에도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 시민은 제대로의 일에 분주하거나 신작로에 늘어선 식당에서 오찬을 즐기고 있었다. 하이얀 대리석과 붉은 융단이 한결 화려한 「오슬로」대학의 대음악당에선 베토벤의 「코리올라누스」 서곡이 장엄하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1958년도 「노벨」 평화상시상식이 엄숙히 거행되었다. 노르웨이 왕올라브 5세와 왕비 아스트리드 비가 고관들을 대동하고 희고 긴 성직자 복장을 갖춘 벨기의 한 신부가 연단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노벨」 평화상의 도의적 명예를 완전무결하게 보존해서 내가 죽을때 여러분에게 돌려줄뿐아니라 이 명예를 한층더 잘 이용함으로써 보다 더 위대한 도의적 명예를 푸짐하게 덧붙여서 여러분의 후예들에게 물려주도록 하겠읍니다…』
수상자는 도미니크·조르즈·삐르 신부였다.
『인간은 너무나 많은 담을 쌓고 있으나 서로 통행할 다리(橋)는 충분히 건설하지 않고 있다.』는 뉴톤의 말을 인용하며 말문을 연 그는 세계가 정신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며 아마 속도는 느릴지 모르나 진보하고 있음에는 틀림없다고 하면서 비록 그 발전 과정이 세걸음 진보하기 위해 두 걸음 물러서는 것이라 하더라도 역시 한걸음 나아가고 있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역설하였다.
한달전 노르웨이 국회 「노벨」상 분과위는 삐르 신부에게 「노벨」상을 수여하는 이유로서 제2차 세계대전 중 수만명의 피난민을 도운 업적을 들었다. 그는 마음가짐이 옳고 그른 사람을 가리지 않고 당파와 국가의 정치 그리고 민족을 초월하여 완전히 자발적이며 아무런 사심이 없는 도움의 손길을 뻗쳤으며 전세계 국민들을 한데 결속시켜 「난민 재건부락」을 건설했던 것이다.
삐르 신부는 1910년 2월 10일 벨기의 「디낭」에서 태어나 「벨러뷔」대학에서 고전연구를 마치고 일년간 철학공부를 한후 1928년 「부룻셀」 근방 「라샬트」수도원 성「도밍고」회에 들어갔다. 1936년에는 「로마」에서 신학박사 가정을 끝내고 「루벵」대학에서 사회학 및 정치학을 계속연구한 후 10년간 윤리철학과 사회학을 교수해 왔다.
『신학을 가르침과 동시에 실천해야 겠다』고 결심한 그는 1938년에 처음으로 2개의 자선사업인 「빈곤한 가정원조단」과 「불쌓한 어린이 보호소」를 설립하여 대전중(1940~1945년)에는 수만명의 어린이를 기르고 V1 및 V2 폭탄에 희생당한 벨기 및 불란서 어린이 1천5백명을 구해냈다.
단 한사람의 인간이라도 그 인간은 존중될 가치가 있으며 인간은 다같이 존엄하고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모든 사람들은 빈약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 그가 2개의 양로원을 설립하자 1만8천여건의 후원연락이 편지와 소포를 통해 들이 닥쳤고 1956년에는 「유럽의 마을」을 독일에다 창설하고 이어 유럽선역에다 동 마을을 설립하니 전세계가 그의 재능을 인정하게 되었다.
1959년에는 파키스탄 정부로부터 사회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방문해 달라는 초청을 받은 그는 때아닌 돌풍으로 2만명의 생명을 앗아간 동부 파키스탄 「치타공」 지방의 참상을 시찰한 후 2년만에 「고히라」에다 「평화의 섬」이란 농장을 만들고 벼농사 증산법과 토지개량법을 처음으로 소개하였는데 「평화의 섬」이라고 이름한 것은 그 농장이 망망한 바다 위에 위치한 희망의 섬을 상징하기 때문이었다.
1964년 4월 그 「섬」의 발전상을 장기간 시찰한 후 수많은 청중 앞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그는 자기의 사업이 가슴에서 가슴으로 통하는 순수한 인간애의 과업임을 새삼 강조하고 어떠한 충돌이나 엉뚱한 속셈은 단연코 배격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식량을 가진자는 안가진자와 서로 나누어 먹을 수 있는 단하나의 마음가짐으로 충분하다고 갈파했다.
「노벨」상 수상 후 6개월 동안 「전인류의 형제」로서 자기가 진 책임을 심사숙고한 그는 불행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착한 마음씨를 세계만민의 가슴에다 심어야 겠다는 「아이디어」를 얻고 「세계를 향해 열려진 마음」이란 비영리적이며 공적인 연합회를 조직했는데 이 단체는 그의 광범한 활동의 배출구가 되었다.
또한 그는 진정한 대화를 통해서만이 인류가 서로 이해하고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1960년 4월 10일 벨기 「띠앙즈·레, 위」에 자기가 받은 상금과 일반기부금으로 대화를 가르치는데 공헌할 「평화의 대학」을 세웠다.
동 대학도 다른 모든 그의 사업에 마찬가지로 초민족적이며, 초교파적인 연구 「센타」로서 그가 표현한바와 같이 『과거에는 무관심하게 서로 모르고 있었거나 혹은 서로 적의를 갖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 서로 통할 수 있는 다리를 놓는 법을 배우기 위한 하나의 「지뢰(地雷)를 제거하는 학원」이다. 이곳에는 전세계로부터 권위있는 강연자들이 보수를 개의치 않고 몰려와서 인간관계, 인간간의 권리, 민족주의, 피난민문제, 계급투쟁, 종교적타면협, 핵무기와 인간지리(地理)를 통한 대화의 현상학 등을 이들 국제학생들과 토의하고 있다. 학생들은 『인간에겐 진정하고 뿌리깊은 닮은 점이 있고 서로 다른 점보다 비슷한 점이 훨씬 더 많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인간이면 누구나 「사랑하고, 고통받고, 죽는다」는 이 세가지 문제에 그들의 운명과 관심이 귀결된다.
우리가 서로 다른 점은 지겨움도록 자주강조 되었으나 우리는 우리의 공통분모(分母)를 강조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라고 부르짖는 삐르 신부의 말이 지난 알멩이를 배우는 것이다.
또한 삐르 신부와 죤H·그리핀씨 등 유명한 인도주의자들의 지도를 받은 학생들은 그들의 모국으로 돌아가서 광범하고 효과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아라비아 학생들은 「모스렘」 교도와 그리스도교인 및 유태교인들을 연합한 단체를 창립했고 아프리카 학생들은 각기 다른 10개의 부족에서 1백50명이 참여하여 함께 「워크·캠프」를 했으며 한 아일랜드 소녀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간에 「대화그룹」을 조직했는가하면 다른 학생 3명은 우표라는 사업을 벌이고 한장에 빵 한개 값으로 팔았는데 이 사업은 파키스탄에 있는 「평화의 섬」을 도와 줄 「평화를 위한 빵 보내기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이제 삐르 신부와 그리핀씨는 전세계에 번지고 있는 민족주의를 제거하기 위한 새로운 활동계획을 짜고 있는데, 그중에는 1961년에 공인(公認)된 「삐르 신부의 세계 우애증진계획」을 확장시키는 문제가 들어있어 「형제적 대화」를 실현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의 흑인들에게 먼저 「세계우애」의 손길을 뻗쳐야겠다고 생각하고 1964년 8월 10일 공동 「콤퓨티케」를 통해 미국의 흑인들에게 다른 시민들과 꼭 같은 존엄성을 부여하기 위해 전세계가 공동노력하자고 제의했다.
삐르 신부는 외쳤다. 『진정한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것은 인류 가운데 있는 차잇점이 인간화되고 상호 이해하는 분위기가 조성된 상태이다.
즉 평화란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손아귀에 거머쥔 무기를 내버리게 하려면 마음과 정신이 품고있는 흉기를 해제함으로써만이 가능하다.
「형제적 대화」야 말로 진실한 평화를 향한 진정한 길이며 유일한 방법이다』라고.
(람파트 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