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人間(인간)] 파라독스
발행일1965-10-10 [제490호, 4면]
『그는 반항을 당하는 증표가 되시리니…』(누까 2·34) 그리스도의 신비는 우리자신의 신비이기도 합니다. 신비체의 머리에 일어난 모든 사정은 그 지체들에게 있어서도 이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강생, 죽음, 부활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자리하시고 이 세상을 이탈하시고 그 육신이 변용되는 신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인의 영신 생활이라면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반드시 그리스도의 이 세 시기에 해당하는 「리듬」을 내포하고 있읍니다. 그리스도교가 인간의 모든 현실을 가장깊이 파고들 수 있도록 우린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그리스도교가 이러한 인간의 현실로 말미암아 변질되도록 버려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누룩을 비유로 삼아 설명하신적이 있읍니다. 누룩은 밀가루 반죽을 깊이 파고들어 반죽전체를 피어오르게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영혼의 세계와 사회안에 작용함으로 이사회전체를 신성화합니다. 또 모든 사람들 마음에 새로운 원칙을 박아놓음으로 천주님께로부터 울려오는 호소의 긴박한 요구를 귀담아 듣게하고 있읍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한 여인에게서 출생한 참 사람이 아니었던들 우리들의 진정한 구세주는 되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지 않으셨더라면 그에 대한 우리의 신앙도 헛되고 우리의 구원도 이룩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천주강생의 업적을 파괴하기는 고사하고 완전하게 이룩하는 것입니다. 이두 신비는 그리스도를 우리 눈에서 앗아 감으로 그의 강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리스도의 강생을 우리마음 속 깊이 박히게 함으로 우리의 육체까지를 신성하게 만들어 구령의 마지막 목표를 향해 힘차게 내닫게하며 그리스도 우리 마음속에 왕하게 하는 것입니다.
영신적인 그리스도교는 언제 어디서나 또 어떤 사물이나 사정안에서도 십자가의 표적을 지적하며 인간의 어떠한 가치라도 성화할 의도하에서만 받아들이고 있읍니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태도는 사람의 생활을 겉도는 것이 아닌것만은 확실합니다. 이는 바로 그리스도의 강생구속의 신비를 진정하게 사는 태도이며 따라서 그 효능을 발휘하는 진정한 활동입니다. 하마디로 그리스도는 이세상의 일원으로 살기만 하기위해 오신것이 아니고 이 세상을 구원해서 당신 성부의 품으로 이끌어 들이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강생하신 우리의 천주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셨읍니다. 강생해서 육체를 갖게되신 천주님은 육체를 통해 죽으셨고 성신안에 부활하셨읍니다. 이렇게 하신것은 오로지 우리를 위해서 하신 것이며 우리의 죄와 죽음을 극복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무한한 사랑으로 하신 것입니다.
천주님의 품을 인간은 되찾게 되었으며 천주님의 무한한 사랑 속에서 인간은 죄없던 원상태로 되돌아 갈수있게 되었읍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굳이 신봉하고 그의 발자취를 따르기만하면 구원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