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화허가를 받고 각 신문사 및 방송국 기자들과 회건한 자리에서 사회발전을 위해 한국국민과 같이 동고동락하고 공생공사하겠다고 밝히면서 한국인이 되면서 한국인에게 하고 싶은 꼭 한마디의 말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야 있건 없건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라고 정몽주의 시를 똑똑한 발음으로 읊었다.
특히 개장국을 즐긴다는 서 신부는 서기호 「徐基湖」란 이름을 짓게된 유래를 말해준다.
『서 대주교님의 성씨를 따서 「徐」로 했고 사미스트회원으로 한국에 처음으로 왔기 때문에 터 「基」 자를 땄읍니다. 그런데 한국에 올 때에 배 안에서 김달호(金達湖) 교수와 의형제를 맺어 마지막 자는 김 교수 집안의 항렬인 「湖」자를 따 徐基湖라고 짓게 되었읍니다』
모짜르트의 고향 「살쯔부르그」 「안테링」에서 출생한 그는 고국엔 어머니와 백씨와 매씨가 있다고 한다. 귀화소식을 누구에게 제일먼저 알렸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물론 어머니에게 입니다. 그러나 놀라지 않았읍니다. 한국에 올 때부터 그렇게 계획하고 어머니께 말씀드렸기 때문입니다』고 대답한 서 신부는 특히 한국인은 좀더 외래문화 모방을 피하고 그 고유문화를 창의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 신부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48년 「살쯔부르그」고교 졸업 ▲48년 「인스부르그」국립대학 입학 ▲51년 「살쯔부르그」국립대학 편입 ▲56년 벨기 「루벵」대학 졸업 ▲56년 신부 서품 ▲57년 한국에 입국, 대구대교구 주교관서 근무 ▲58년 「가톨릭시보」 사장 ▲51년 대구 내당동성당 주임 ▲63년 도구 ▲64년 구라사업 지도 ▲65년 대구대교구 가톨릭학생연합회 지도신부 겸 「가톨릭시보」 논설위원
▲서 신부의 업적
- 경북 고령군에 은양원(나환자촌) 설립
- 의성군 다인면에 신락원(나환자촌) 설립
- 칠곡군 칠곡면에 구라종합병원 설립
- 대구시내에 나환자들의 자녀인 미감아를 위한 기숙사 설립
- 부산시내 3개 처에 6·25 난민주택, 「아파트」를 설립(250세대 입주)
- 효대 교사와 시내 신암동 「파띠마」병원 건립의 일부를 지원
- 경기도내 산간벽지에 발전시설 및 상수도 시설 지원
- 경기 및 경북도내 수개소에 농지개간, 저수지 건립
- 경기도 안양읍에 노동자 기숙사, 서울 대구에 가톨릭센타 건립
- 대구시 내당동에 현대식 성당 건립
- 경기도 서정리의 효명중고교 및 경북 영천읍내와 대전시 직업보도학교에 각각 기계 원조
- 외국유학생 40명 및 국내 장학생 백여명에 장학금 지급
이상을 위해 오지리 가톨릭 부인회 등에 호소 원조금 총1백만 「달라」를 그간 지원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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