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에서는 기계를 사용하여 농사를 짓는데 반하여 우리는 아직도 호미자루를 쥐고 농사를 짓고 있다.
서독같은 나라에서는 농업인구가 불과 7%밖에 안되는데도 그 나라의 식량을 70% 이상 자급자족하고 있는데 대하여 우리는 농업인구가 70% 가까이 많이 있으면서도 우리나라의 식량을 자급자족을 못하고 있다. 밭(田)은 일정한 면적인데 농업인구는 점점 불어나 더욱 농업의 영세화(寧歲化)와 빈궁(貧窮)을 거듭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가난이라는 팔자(八字) 붙은 대명사로 고정되어 가고 있다. 농부가 즉 가난, 가난이 즉 농부라는 이 팔자는 배운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비천한 인간이기 때문에, 이렇게 농부 자신은 체념하고 만다. 그래서 농부는 자식을 낳으면 너는 농사군이 되지 말고 어서 공부하여서 벼슬아치나 되라고 하여 있는 땅덩어리와 소를 팔아서까지 공부를 시키려고 한다.
참으로 우리는 도시에 앉아서 백옥같은 흰 쌀밥을 먹고 있지만 흰 쌀을 만들기 위한 농부는 뼈대만 남은 몸에는 시커먼 흙투성이 그것뿐이다.
교우이고 교우 아니고 간에 신앙도 죄의식조차 구별할 수 없는 기아선상에서 허덕이고 있는 자들이 바로 그 농부들이다.
농자는 천하지 대본이라는 구호로 가끔 튕겨 나오기도 하지만 이러한 아름다운 소리가 그들의 귀에 들릴 것인가?
유구한 역사, 대한의 수호자가 농민이었거늘 한국의 대다수가 농민일진데 대한의 주인공인 농부의 비참은 곧 우리나라의 비참이다.
농민이여 네 이름은 가난이로다. 대한의 땅에 태어났다는 그것이 죄였던가? 조상의 무슨 잘못이 있었기에 지금의 보속이란 말인가?
이러한 농촌문제는 강 건너 불난집처럼 쳐다보는 격이 아니다. 조그맣게는 시골본당 문턱에 바로 닿은 문제이고 크게는 우리나라 전체에 살 길을 모색하는 절박한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농촌이 산다는 것은 한국이 산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 敎會는 너무 等閑했었다
한국의 농촌 빈곤문제는 국가적인 문제요, 사회적 고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 교회로서는 도저히 이 문제 해결을 어떻게 할 길이 없는 것이기도 했다.
또 해방 이후 우리 천주교회의 교세는 세계에서 으뜸가는 격증률을 보였고 성직자 수는 이들을 맞아들이는대도 부족하였을 뿐만 아니라 NCWC를 통한 구호물자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니 이것을 분배해 주는 시간적 여유조차 없었다. 한국의 천주교회 교세를 너무 낙관한 성직자에게 농촌문제이니, 빈곤타개책이니 하는 따위의 어휘는 들어보려고 조차 하지도 않는 처지인데 그래도 필자는 몇번이고 강조하고 앞으로의 농촌전교사업을 하는데는 농촌문제에 대한 어떠한 근본대책이 있어야 한다고 애원도 해보았다.
실로 순박한 농민의 기구가 천상을 감동케 할 것인데 우리는 보다 농업생산을 과학화하여 많은 소득을 올리게 하면서 기구하며 노동하는 참된 신앙의 「모토」를 실현해 보자는 구상 아래에서 신앙의 「모델」 농장을 제의해 보기도 하였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이 자립정신을 우리 농민이 먼저 가져야 하며 또한 농부는 천주의 창조사업의 하나인 농작물의 조수로서 가장 천주와 결합하여야 할 귀한 존재이기에 이러한 실천을 가질 농장이 필요하다고 역설도 해보았다.
그러나 프로테스탄측에서는 열렬히 찬성을 하면서 받아들일 태세까지 갖추려고 하고 있는데 반하여 우리 가톨릭측에서는 냉냉한 태도임을 볼 때 필자는 한 때는 한 숨도 길게 쉬어보고 한 때는 답답한 가슴을 두드려 보기도 했다.
실로 우리 교회에서는 국가의 산아제한방법에 대하여서는 적극적인 반대도 하였으나 농촌인구 증가문제에 대하여서는 실천면에는 소극적이었다. 가톨릭이민이라는 방법으로 인구문제 해결을 모색하기도 했지만 덮어놓고 이 땅에 있는 사람무리를 저땅으로 옮겨본다는 주먹구구식의 이민으로서는 무슨 성과를 올릴 것인가.
저 땅으로 옮겨간 이민들의 동태는 결론적으로 평이 나쁘다고 듣고 있다. 가톨릭 이민을 보내려면 적어도 1년간의 훈련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농업이민이면 농업훈련을 하기위한 농장이라도 마련하여야 하며 가톨릭적 농업훈련을 철저히 쌓는 방법을 강구한 다음에야 이민을 보내야 한다.
훈련 없는 이민은 마치 훈련없는 장정이 싸움터에 나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철저한 훈련을 쌓은 군인도 싸움테서 이길 것인가 하는 정도인데 하물며 훈련 없는 이민이 저 땅에 가서 무슨 성과를 거두겠는가.
아제라도 늦지 않으니 앞으로도 가톨릭 이민을 도모한다면 먼저 훈련도장인 농장을 가톨릭측에서 마련하여야 한다.
이민과 농촌문제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이렇게 장황하게 말을 늘어 놓았는가 할지도 모르나, 모름지기 우리 교회측에서는 어째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교우(교수)들과는 상의하려고 하지 않는가.
아는 길도 물어서 가라는 말고 있는데, 가톨릭 측에서는 너무나 시행착오의 길을 걷고 있고 만사가 성직자가 아니면 일이 안된다는 어떠한 전제의식이 농후하게 몃보이는 듯 하기도 하다.
우리는 앞날을 위하여 일반 교우들도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하여 개방하여 주기를 바라며 이민문제, 이민훈련에 대한 철저한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는 교우도 있다함을 여기에 부언하여 둔다.
■ 他宗派의 눈부신 活動
필자는 프로테스탄 인사와 가끔 만나는 기회가 있다. 그들은 앞으로 농촌포교사업을 위해서는 목사나 전도사도 농사를 알아야 된다고 갈파하고 있다. 그리고 농민생활이라는 역사 깊은 월간잡지가 농촌으로 나가고 있고 농촌계몽과 아울러 포교사업에 선두를 달리고 있다.
대전에서는 기독교연합 주최로 설립된 농민학원 농민훈련도장 등에서 각 교파에서 파견된 간부를 양성하고 농업기술을 전적으로 습득시키고 있는 곳도 있다.
그밖의 목사나 기타 지도자가 경영하는 농민학원, 공민학교 등 가난한 농민의 아들 딸을 위한 농업교육을 실시하고 있고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가나안」농군학교(경기도 광주군)는 그 장로 김용기씨는 철저한 기독교적 농민양성을 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고 이민훈련도 여기서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농과대학 안에서도 가톨릭학생회의 활동은 미미한데 반하여 프로테스탄의 SCA에서는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세계 「워크캠프」니 하기봉사니 등등 참으로 화려하고도 신나는 활동을 하고 있다. 따라서 농촌운동 계몽운동 등은 가톨릭학생회는 SCA이 활동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실로 다른 교파에서는 위에서나 나래에서나 종으로 횡으로 연결을 맺어서 열렬하게 농촌문제 해결에 앞장서고 있는데 대하여 우리는 부럽기만 하고 한편 부끄러운 마음으로 반성도 해본다. 그러나 우리 가톨릭층게서도 농촌문제에 대하여 열렬한 농학도 교수들도 많이 있다. 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개척사도 또한 농촌지도자 중에서도 교우를 많이 만날 수 있으며 모두 우국지정에 넘쳐 흐르는 인사들이 많이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힘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어떠한 구심력만 있다면 한데 뭉칠 수 있는 귀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요는 우리 교회 측에서는 이러한 인재를 캐려고도 하지 안고 아예 캐볼 생각조차 없다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하여야만 할 서글픈 신정이기도 하다.
또 우리는 타교파의 화려한 활동을 본따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 교회측에서도 좀더 구심력을 가질 수 있는 아량만 베풀어 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 NCW 勞苦 컷으나 功 적어
6·25라는 처참한 비극을 겪은 우리 민족은 모두 알거지가 되었지만 이때 NCWC에서는 밀가루 강냉이 의료 약품 등 많은 구호물자를 외국에서 들여와 큰 고움을 받은 것은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의뢰심이 많은 우리 백성들은 교회만 나가면 구호물자를 탈 수 있다고 하여 구호물자 교우도 많이 생긴 것도 NCWC의 덕택(?)이라 할 수 있다.
또 NCWC가 한국실정을 잘 모르는 틈을 타서, 개간한다 간척사업을 한다고 중간 부르카는 막대한 구호물자를 횡령한 것도 많다.
그 풍부하고 유효적절하게 쓸 수 있는 구호물자는 이리 속아 넘어가고 저리 속아넘어가고 하여 시장에 난데없이 팔려다니는 구호물자도 있었다.
이 구호물자를 농촌진흥사업에 썼었던들 오늘과 같은 가난뱅이의 농민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필자가 구상하는 「모델」 농장에 썼었던들 그 공적은 길이 남았을 것이다.
자활의 길을 열 수 있는 농민에게 자력이 자극을 주기 위한 구호물자이었어야 하겠거늘, 자활이 능력을 없애게 하고 의뢰심만 조장한 구호물자가 되고 말았으니 NCWC의 노고는 컸으나 공은 적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이제 금년 7월 1일부터는 말썽많던 구호물자의 취급도 모두 정부기관에 넘겨 버렸다고 하니, 우리 교회 농촌 전교사업에 가장 긴요하게 쓸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치게 된 것을 퍽 아쉽게 생각하며 또한 필자가 구상했던 교회의 「모델」 농장도 하나만이라도 그 기회에 설 수 있었던들 애석한 마음이 덜 가실 것이다.
■ 農學徒는 奮發해야
지난 「가톨릭시보」에서 우리의 교우수는 70만명이고 교세증가율은 차차 줄어든다고 보고한 바 있다. 즉 연간 증가수는 3만7천5백여명에 비하여 냉담자 수는 4만5천명이라고 하는 놀라운 숫자를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교우증가수 보다 냉담자가 많다는 것은 참으로 우리의 교세가 막다른 골목에 왔다고 어떤 경종을 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같은 날자의 「가톨릭시보」에는 「한국근대화와 신앙의 위기」라는 제목 하에 물질숭배 사상의 팽창일로와 취생몽사 삶의 의의를 몰라 결국 3m시대의 비극을 자아냈다고 갈파한 것을 위시로 하여 농촌의 비참상도 신앙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어느 시골 본당주임신부는 농촌의 전교사업은 암담한 느낌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농촌의 후진성은 저생산성으로 인하여 삶의 의욕을 잃었고 교우증가 수 보다 냉담자가 많아질 뿐만 아니라 현재의 교우의 신앙상태도 굳건치 못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리하여 그 신부는 신학교 시절에 농촌문제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배웠던들 여기에 대한 어떤 대책이 있었을 것이라고, 농촌문제에 대한 너무나 문외한이 된 것을 후회하기도 하였다
영적 지도에서만도 벅찬 일인데 신부가 농업을 연구하여야 하겠다는 말을 들을 때, 농학도의 교우로서 가슴을 따끔하게 찔린 것 같았다.
실로 농학을 연구한다는 가톨릭 교우는 이 농촌의 현실을 어떻게 보며 어떠한 행동으로 나가야 되겠는가.
딱딱한 복음의 소리를 들으러 성당을 찾아가는 것 보다 가만히 앉아서 「앰푸」의 달콤한 「멜로디」에 더 즐기게 되는 농촌 젊은이들이 더 늘어만 가고 있는 이때에 가톨릭농학도는 그저 방관만 하고 있을 것인가?
교우라고 이름이 붙어있는 농학도라면 적어도 자기 자신이 신비체의 하나라고 느껴진다면 나아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천상의 명령이 귓전에 울리지 않을 길인가?
배우는 도상에 있는 농학도이기에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교수이기에 언제 농촌을 계몽하고 전교할 시간적 여유가 있겠는가 한다면 다시 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농촌을 더 잘 파악하고 있으며 현재 농촌이 영신상이 문제도 위기에 처하여 있다는 것을 알진데 농촌을 위한 봉사활동 또는 농촌의 구령사정에 협력한다는 시간마저 아깝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호소하여야 하겠는가.
한국 땅에 살고 있는 우리 농학도가 농촌문제해결과 구령사업에 앞장서지 않고서는 우리는 무엇을 하려고 태어났으며 누구를 위한 존재인가. 실로 평신도사도직의 활동도 이때가 바로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이 된다.
우선 각 교구마다 또한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가톨릭농학도들은 한데 모여서 조직적인 가톨릭 「액숀」을 전개하여야 하겠다. 교구당국에 간청하고 싶은 것은 적어도 이러한 구심력(求心力)을 가진 어떤 모임(가톨릭농촌연구회…가칭)이라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여 주시기를 기대하여 마지 않는 바이다.
우리 나라의 대다수가 농민일진데 농민을 위한 선교사업이 가장 중요한 것이어늘, 어쩐지 우리나라의 전교사업은 도시중심적인 느낌을 의심하게 된다. 그것은 도시본당은 언제나 생기가 돋는듯 하는데 반하여, 시골본당은 주일날을 제외하고서는 쓸쓸하기 짝이없다.
가톨릭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온천하 만민은 모두 천주의 자녀로서 영원한 복락을 누려야 할 귀중한 존재이거늘 우리는 더욱 교회측과 협력하여 농촌의 전교사업으로 매진하지 않으면 안된다.
참으로 가톨릭 농학도의 보람있는 일도 여기에 있다고 자위하면서 우리는 더욱 개인성화에 힘을 기 울여야 하겠다.
金元敬 교수(서울농업대학 가톨릭학생 지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