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톨릭 敎會에서는 世紀를 通하여 傳統的으로 지켜오던 禮典을 지난번 第2次 公議會의 決議에 따라 多少 變更시켰다. 特히 羅典語 祈求文을 邦語로 번역하여 놓은 点은 注目할 만한 일이다. 한편 啓示의 말씀을 充分히 理解시키고 傳統的으로 使用해 오던 祈求文을 短時日內에 母國語로 번역한다는 것이 그리 容易한 일이 아님은 周知의 事實이다.
充分한 硏究 끝에 번역된 祈求文이라도 전통적인 말에 젖은 우리 精神에 不自然스럽고 서먹서먹한 感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嚴肅하다」는 우리 敎會의 聖堂과 禮典의 特色을 앗아간 듯 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는 舊式에서 新式으로 옮아가는 過渡期에서 不可避한 現狀이라고 諒解하기도 한다. 다만 때로는 祈求文의 번역이 우리 通俗語에 맞지 않는 듯한 点을 이 글에서 指摘하여 讀者와 뜻있는 이의 高見을 參酌, 앞으로 우리 敎會禮典 用語 採擇에 더욱 큰 成果를 바라는 마음에서 몇마디를 하고자 한다.
지난번 韓國 主敎會議에서 通過된 後 出版된 미사 통상문을 보면 司祭와 敎友 間에 주고받는 經文들의 動詞를 大部分 除去하고 名詞와 後置詞로서 滿足하고 있다.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셔지이다』를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로 잘라 놓았다. 이 新用語는 都大體 말이 半밖에 되지 않아서 외우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不滿感을 갖게된다.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했더니 어떤 敎友는 『꽁지가 없읍니다』라고 하여 鍊習하다가 폭소를 터뜨렷다. 如何間 動詞가 빠지고 보니 『…함께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의 直觀的인 反問이 나올 程度로 否定的인 經文이라 아니할 수 없다.
原文에 動詞가 없다는 理由로 이 經文의 動詞를 없앳다면 우리 말과 羅典語의 性格을 理解하지 못한데서 緣由된 것이 아닐까? 羅典語에는 動詞 없는 表現이 있으나 特殊한 境遇를 除外하고는 우리 通俗語에도 動詞 없는 말이 有效하게 使用되고 있는 것인지 疑問스럽다.
西洋 말은 名詞와 前置詞 或은 代名詞와 後置詞만으로써(勿論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도 意思 表示를 할 수 있다.
벌써 動詞의 뜻이 內包된 까닭이라 하겠다. 反對로 우리말은 動詞없이 名詞나 代名詞와 後置詞만으로써 完全한 表現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或間, 名詞만 쓰는 境遇도 있으나 이는 발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가령, 『안녕』이란 말은 親友나 어린이들에게서나 쓰는 말이다. 或은 어린이들이 말을 미쳐 다 못배웠을 때 밑도 끝도 없이 『밥!』이니, 『과자!』니 動詞 없는 말을 쓰는 境遇도 있다.
『천주께 감사하나이다』와 『거룩하시다』는 原文에 動詞가 없어도 우리말에 動詞를 붙여 飜譯하였다. 『천주께 감사』 했을때, 不安感을 느끼게 되고 『거룩, 거룩』 했을때 不安하고도 不安定함을 免치 못한다. 原文에 動詞의 뜻이 包含되어 있는 것이라면 性格이 다른 우리말에는 이를 우리 文法대로 表面化함이 妥當하지 아니할까 한다. 『거룩, 거룩』 했을 때 不安感을 느끼게 하는 것처럼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주를 향하여』 『주께 영광』 등도 不安全하고 어색함을 禁치 못함을 다만 文法의 理論에 어두운 衆生들의 所致로만 여김이 옳을 것인지! 우리는 一般的으로 文章이 動詞가 없이는 不完全함이 通俗이니 발말밖에 안되는 原文 그대로 옮겨 놓는 無理는, 아무리 그것이 對話式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答辯하는 側, 即 敎友들의 部分에서만이라도 삼갔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달리 번역하기가 極難하였다 손치더라도 不足한 表現밖에 못하는 식을 擇해서는 안되었을 것이다. 新式禮節과 新式 用語가 敎友들에게 理解할 수 있다는 長点도 있으나 舊式에 비겨 嚴肅하지 못하다 하여 서운한 感을 禁치 못하고 있느 ㄴ판에 반말같은 말이 미사 中에 큰 소리로 오고가게 되니 한 層 더 무게가 없어지고 엄숙한 感을 잃게 된다.
미사 用語는 公式으로 天主께 드리는 念經祈求文이라는 点에 想致할 제, 對外的인 面과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全般的인 面을 考慮하여 가장 完全하고 가장 「스므스」해야할 것이 아닌지? 原文 번역에만 充實한(?) 것이 公議會 決議 精神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敎會 當局에서 傳統的으로 써오던 羅典語로 번역하도록 분부한 理由가 우리사람에게 오시는 天主의 말씀과 聖寵을 理解性 있고 有效 適切하게 받아들이기 爲한 正當性 때문이라면 原文을 말마디 대로만 번역해서는 보람이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母國語로 바꾸어 놓아서는 完全한 번역이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말마디뿐 아니라 뜻까지 살려야만 했을 것이다
羅典語에 動詞가 없는 部分이라도 動詞의 뜻이 包含되었을 때, 우리 말로는 動詞가 없이는 不完全하니 動詞를 넣어야 했을 것이다. 比較的 羅典語에 가까운 英語나 佛語에서는 위에 말한 新式 祈求文에 動詞를 널어서 번역되었다고 한다. 우리 통상문과 같이 直譯하지 않고 意譯했다는 것이다.
聖寵은 自然(通俗語)을 파괴하지 않고 완전케 한다고 했다. 聖寵의 道具 역할을 하는 禮典이나 禮典에 쓰이는 用語도 각 지방의 通俗語를 참작하여 選定돼야 할 것이며 通俗語에 맞지 않는 말은 삼가야 할 것이다. 만일 通俗語론 번역이 안되는 경우에는 사람들이 잘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을 써야할 것이다.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셔지이다』 와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가 다 完全한 通俗語가 못될 경우, 차라리 前者를 擇함이 적당했다고 생각한다. 『마음을 드높이』보다 『마음을 위로 높일지어다』가 비교적 完全하지 아니한가? 動詞 없이는 말이 完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動詞 없이는 意思를 완전히 포현할 수 없고 따라서 반말밖에 안되매 不完全하고 엄숙한 감이 결핍된 것이다.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시간이 해결되리라는 主張이 全然 理解 못하던 羅典語도 時間이 經過했을 때 어느程度 익숙하게 되었다는 사실로는 辯明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많은 反省과 연구를 거듭한 끝에 결정적인 번역을 이루고 더구나 主敎會議에서 통과된 祈求文을 비판함은 지혜롭지 못한일이라 하겠으나 拙者의 意見이 또한 一理가 있는 것이라면 將來의 禮典에 있어 더욱 큰 發展을 위하여 재검토할 여지가 있는듯 하여 이 글을 諸賢에게 붙이는 바이다.
변 시릴로 神父(忠南 唐津본당 주임 神學博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