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라파 겉 핥기 錄(록) (7) 밭티깐市國(시국)의 총인구 1천명
세계 최소의 바티깐시국
국경표시 없고 「바티깐 궁·베드루」대성당이 전영토 거의 차지 웅장한 「베드루」대성당서 라파엘·미켈란젤로의 예술을 감상
발행일1965-10-17 [제491호, 3면]
「로마」에 왔다가 「바티깐」을 안봤다면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 구경이 된다.
두말할것 없이 세계 6억의 가톨릭교회를 다스리는 곳이며 교황성하께서 계시는 마을이다.
면적이 0.44「킬로미터」 평방밖에 안되니 마을이라고 있지만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우표도 화폐도 따로 발행하고 있는 당당한 독립군인 것이다.
「로마」시내 서쪽일각에 자리잡고 있는 이 조그마한 나라는 1929년 2월 11일에 독립된 나라라던가?
이 나라에 들어가는데는 통관세도 필요없고 세무관리도 없다.
나라라곤 하지만 「바티깐」궁 건물과 「베드루」대성당과 그 건물의 부속된 땅정도이며 유별난 무슨 국경의 표시도 없다.
『「바티깐」 시국의 총인구는 얼마나 되는가요』
『천명 가량됩니다』
안내자의 설명이었다.
『천명의 국민을 가진 국가군요』
『그렇죠. 그렇지만, 그 국민은 주로 성직관계자들이죠.』
『저 화려한 군복차림은 「바티깐」 군대인가요』
『뭐 군대랄게 있나요. 중립국인 스위스 사람을 용병으로 사용하고 주로 호위병과 수문장 노릇하는 정도의 임무를 띠고 있지요』
「바티깐」 의장병들의 고대복장은 화려하기만 했다.
세계 각국의 운동선수를 접견하는 날, 그 넓은 「베드루」대성당 광장은- 빽빽하게 10여만명이 들어차 있었다.
교황성하께서는 운동선수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곧 이어 이태리말, 불란서말, 영어, 독일어 그리고 스페인말 등으로 교황성하의 말씀을 통역하는 것이었다.
「구라파 사람 중심으로만 통역되는 군」하고 슬그머니 섭섭한 생각을 하면서 못알아들을 각국어의 통역을 지루하게 듣고 있으려니까 난데없이 귀익은 소리가 들린다.
일본말이 통역된다.
『이크! 동양말도 나오는군, 이 운동선수 속에는 한국 사람도 있으니까 우리 한국말도 나올는지 모르겠네…』
나는 몰래 흥분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일본말이 끝나니 곧 중국말이 나왔다. 『적어도 지금쯤은 나올 「찬스」다』
숨을 죽이고 「스피카」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우리의 한국말은 이 「바티깐」 시국의 국제무대에서 인정안해주는 것이었다.
무척 서운했다. 약소민족으로서의 서러움 같은 것이 북바치기도 했다.
「바티깐」국은 아주 작은 나라이면서도 종교의 왕좌일뿐아니라 문화적으로 예술적으로 더 나아가서는 정치 외교에도 무한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최강의 보이지 않는 힘을 갖고 있는 나라인 것이다. 한국의 독립을 맨 먼저 인정해준 「바티깐」국이었지만 「한국말」 대접은 못 받은 셈이다.
국가시험에 합격되어야만 면허증을 받을 수 있다는 관광요원증을 가진 이태리 대학생은 열심히 녹음기계 처럼 「베드루」대성당을 설명하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장려한 대성당입니다. 이태리 「르네쌍스」 및 「빠르크」 예술의 전당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교황의 권한이 신장되어 있을 1506년, 유리우스 2세 교황께서 유명한 부라만테에 명을 내려 기공하고 그후 라파엘·미켈안젤로 등의 유명한 예술가들이 계승해서 1626년에 준공을 본것 이랍니다.
그러니까 우르반 8세 교황때에 완성을 보게 됐죠』
나는 높이가 1백32「미터」나 된다는 대성당의 둥근 지붕을 고개가 휠 정도로 뒤집고 찾아봤으나 보이지 않았다.
『아니, 사진에서 보는 「베드루」대성당의 둥근 지붕이 어디 있죠?』
『이 마당에서 보이나요? 정면건물에 가려서- 멀리 떨어져서 보든가 비행기 위에서나 보든지 해야지』
둥근 지붕도 미켈란젤로의 명작으로 소개되고 정면에 쭉쭉뻗은 네개의 큰 기둥도 명장 베르니니의 작품이라고 자랑할 만큼 예술의 향취가 돌조각 하나하나에서 다 풍기는 것이었다.
『이 성당 짓는데 오랜세월 걸렸다죠』
『1백20년 동안이나 걸렸죠』
이 「베드루」 대성당을 향해서 오른쪽 돌기둥 살이 늘어선 곳에 「청동의 문」(PORTONE DI BRONZO)이었다.
이문이 곧 「바티깐」궁의 정문이 된다. 이 궁안에서 세계적으로 이름난 예술품과 역사적인 「시스티나」성당, 법정, 박물관 미술관 등이 있다.
나는 조용히 다 잊어버린 서양사의 흐름을 추상할 수 있었다.(필자, 전경향신문 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