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공용어심의 위원회」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새로 번역한 기도문을 「가톨릭시보」에 공공하여왔고 최근엔 심의단을 비롯한 몇가지 기도문의 시역을 끝낸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는 그 시역을 받아보면서 우선 그분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느낀다.
더구나 심의위원들이 모두 바쁜 공직에 있는 분들이기에 더욱 노고가 컸으리라 믿는다.
한편 거기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너무 희박한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다. 물론 그것이 전문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무관심이 정당하게 핑계되어질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바로 우리 각자가 사용할 기도문이라는 점이겠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그것이 전문적인 분야이기는 할지라도 한낱 무관심한 구경군역을 해서는 안된다.
때때로 마땅히 가져야 할 관심의 결핍때문에 커다란 손해가 오는 수가 있겠다.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기도문에서 우리는 그것을 맛보고 있다.
모든이가 좀더 깊은 관심을 표명했던들 「나와 성부(聖父)가 동격(同格)이 되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기도문을 우리는 매일 외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물론 변명한 분의 말대로 그것이 문법적으로 틀리지 않을 수는 있다. 그러나 바로 그점때문에 그것을 매일 외워야 하는 우리의 안타까움은 더욱 큰 것이다. 차라리 문법적으로 완전히 틀렸다면 당장 그만두어도 되겠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머리속에 잠재해온 무관심이 이같은 비극을 빚어냈다.
이런 결과를 우려하여 가톨릭 용어위원회에서는 시역을 발표한 후 널리 의견을 모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극히 다행한 일로 여겨지며 그들의 처사를 환영한다.
물론 우리는 의견(意見) 청취의 요구를 받았건 안받았건간에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어 말한 자격을 가진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임무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몇가지 원칙이 필요하다. 우리는 의견을 말하기 위해 먼저 우리의 입장에서 연구를 해봐야 한다.
나아가서 우리는 앞으로 교회에 들어올 외인(未信者)들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새 기도문이 우리 교우에게는 아주 잘맛는데 외교인에게는 어색한 번역문이 된다면 이역시 커다란 실패작이 아닐 수 없다.
교회가 모든이를 그리스도의 품안에로 인도해야 하는 사명을 갖고있는 이상 한시라도 외교인들을 등한히 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기도문 번역은 누가 보아도 어색함이 없는 아름다운 표현이어야 하겠다. 그리고 아름다운 표현이 간접 전교의 중요한 역임(役任)을 하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아무쪼록 훌륭한 의견들이 반영되어 더욱 깨끗하고 더욱 아름다운 우리말로 천주님의 거룩한 이름이 기리어지기를 빈다.
김영교(서울 鐘路區 惠化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