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알려지지 않은 교회사] 1920年(년)경의 神學校(신학교)
윗층이 大神學校(대신학교) 아랫층은 小神學校(소신학교)
入學(입학) 한달뒤부터 日常會話(일상회화) 羅典語(라띤어)로
3年(년)에 한번씩 募集(모집)
발행일1965-10-17 [제491호, 4면]
목자없는 교회란 암흑이라.
세상의 영혼들이 신의사랑에 진보할 수 있기 위하여 생애를 바치는 목자들은 교회의 주춧돌이다. 이러한 목자들을 길러내는 신학교의 교육이야 말로 얼마나 중요한가는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신학교 교육에 평생을 바치는 목자들의 고마움과 수고는 다른 어떤 분야에서의 성직자 활동에 못지않는 것이리라.
한국신학교의 변화 발전상도 많은 연구문제를 오늘날 제시해줄 수 있다고 보고 싶다. 여러 면에 있어서.
그러면 1920년, 당시 용산학당으로 불리워지던 신학교의 교수진을 살펴본다. 용산학당은 윗층에 교실 하나가 있어서 이것이 대신학교, 아래층에 또 하나의 교실이 있어 이것이 소신학교였다. 소신학생 약60명, 대신학생 약30명, 아주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운영되어 나갔음을 알게 한다.
소신학교는 3년에 한번씩 모집이 있었는데 그때 학생들의 나이 차이는 현저했다. 지금은 영세한지 3년만 넘으면 신학교에 입학할 자격을 얻지만 그때에는 그러한 신문교우는 없었고 모두 구교가정에서 믿음이 뿌리깊이 박혀진 가정의 자녀들만이 모여 들어오고 있었다.
입학해서 한달동안은 학교 측에서 한국말을 하게 내버려두었지만 한달이 지나면 평상시의 회화도 꼭 「라띤」어로만 해야했기 때문에 어학공부의 어려움이란 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라띤어 공부의 진도는 놀랄만한 성과를 보여주었다.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YMCA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던 장면(張勉)박사는 나이 겨우 스물하나. 하루는 명동성당에 성사를 보러갔는데 박신부(불란서인)님이 부름을 받고 들어가본 즉 용산학당에서 급히 선생을 구하니 한번 가보도록 하라면서 「메모」를 주기에 가지고가서 그때 교장신부였던 진신부(불란서인)를 만나보니 당장 신학교에 와서 학생들을 가르쳐 달라는 부탁이어서 곧 취직하게 되어 몇 과목을 맡게 되었다.
그동안 조원환(曺元煥, 故人이되었음) 선생이 맡고 있던 기타 과목을 인계받은 셈이다.
기타 과목이라함은 산술·지리·역사·일어 등이었는데 교편생활에 경험이 없었던 탓으로 애로도 있었지만 상대방이 신학생들이라 생각했을때 정능에서 용산까지 매일 자전거로 출퇴근하면서도 조금도 피곤을 모르리만큼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그 당시 순사들의 월급이 6원, 7원할때 장박사는 30원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기타과목과 한문이 있었는데 한문은 그 당시에도 한문에 능통하여 권위자로 알려졌던 할아버지 이베드루씨가 가르치고 있다가 다시 후임으로 50세미만이며 쟁쟁한 판사였던 방(方)바오로씨가 맡게 되었다. 세속사람으로서는 한문과 기타과목을 두 사람이 맡았고 「라띤」어, 철학, 신학, 성가, 교리 등은 모두 성직자들이 맡았는데, 그때의 성직자 교수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진베드루(불란서인) 교장신부 「라띤」어 ▲유에밀로(불란서인) 신부 「라띤」어 ▲원아드리아노(불란서인, 전대전주교) 주교, 신학, 철학 ▲김아릭스(한국인) 신부, 신학, 철학 ▲안풀로리아노(불란서인) 주교, 신학, 철학
그리고 지신부(불란서인)가 단가사무를 맡아보면서 성교회역사를 가르쳤다. 학생들은 무엇보다 「라띤」어 공부에 전력을 다하면서 윤리신학, 교리신학에 열중했다.
그리스도의 참된 대리자로서 영원히 주안에 살기 위해서 세상에서 귀중한 청춘을 바치고, 나아가서는 한평생을 에누리 없이 고스란히 교회에 즐겨 바치는 거룩한 성직자가 되기 위한 준비과정인 신학교생활을 시대의 어떤 변화속에서도 긍지를 가지기에 마땅하며 또 그들이 아무런 불편없이 준비과정을 보다 성과있게 마칠 수 있기 위해서 선배성직자 그리고 일반신자들은 자기가 할수 있는 최선의 힘을 다해야 할줄로 믿고 있다. 한사람의 목자를 위하는 일은 곧 여러 사람들을 위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