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年度(년도) 信者(신자) 增加(증가) 正常的(정상적)인가
盲點(맹점)是正(시정)해야 할 것 많아
公議會(공의회)가 劃期的(획기적)으로 뿌린씨 거둘 能力(능력) 不足(부족)한 韓國敎會(한국교회)
敎勢(교세) 增加(증가) 展望(전망) 흐려
減少(감소) 理由(이유)=生活(생활) 向上(향상), 貧困(빈곤)지나쳐도 宗敎(종교)에 無關心(무관심)
國民(국민) 關心(관심)은 物質(물질)·快樂(쾌락)등에 기울어지고
現實情(현실정)으론 「社會(사회) 參與(참여)」 어렵고 司牧(사목) 方案(방안) 再檢討(재검토)돼야
冷淡(냉담) 서울·水原(수원) 外(외) 全敎區(전교구)서 늘어 豫備(예비)·入教後(입교후) 再教育(재교육) 모두 不足(부족) 「信仰(신앙)」 生活化(생활화)의 缺乏(결핍)으로
指導(지도) 着實(착실)한곳 冷淡者(냉담자) 적고 增加(증가), 活動(활동)·對人(대인) 接觸(접촉) 正比例(정비례)
작년도와 비교해서 통계의 전체적인면에 나타나는 차이, 그리고 대인영세자수와 냉담자수의 교구별 순위에 치중하여 분석해 보기로 한다.
①연간 영세자 순위(부산·서울·인천·대구·청주·춘천·수원·전주·광주·대전)와 냉담자 순위를(광주·춘천·대전·대구·인천·서울·청주·전주·수원·부산) 비교해서 발견할 수 있는 점은, 대체로 보아 영세입교자가 많은 교구일수록 냉담자가 적은 점이다. 이것은 영세자가 많은 이유는 무어무어니 해도 교회와 외교인과의 접촉이 빈번한데서 온다고 본다. 인간은 사회 환경의 압력으로써 이미 속했던 단체에서 떠날때는 그 단체가 자기의 종속감을 채울 수 있는 다른 단체 이어야만 한다. 영세자를 많이내는 교구는 교구 자체가 하나의 사회단체로서 활발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 체면문제 때문이라도 쉽사리 교회를 이탈하지 않을 것이다. 즉 새로운 신자들이 모여드는 교회에서 기성신사가 반대로 떠나간다는 것은 추축하기 곤란하다.
②대인 영세자 순위와 본당수 순위를 비교한다면 대체로 조화되는 비례를 나타낸다. 이것은 비단 전교신부나 전교회장들과 비신자들의 인간대 인간의 접촉뿐아니라 그것을 조장시키는 교회건물이 가톨릭교에 대한 인식을 충동하는 자극제가 될수 있고 그만큼 교회와 비신앙자들 사이의 접촉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③61년도와 65년도 예비자의 증감을 보면 인천교구와 광주대교구를 제외하고는 모든 교구가 감소되었다. 인천은 작년의 그 활발성(작년 통계자료 참고)을 계속 유지됨이 나타났으며 광주대교구는 다른 모든 면에서는 이상하게도 낮은 율을 보이고 있으나 금년도 예비자수는 작년보다 늘어나고 있다. 이례적인 현상이 정상화 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같다. 왜냐하면 어떤 사회학자(WILFRED PARETO)의 설에 의하면 사회는 그 규모의 대소를 막론하고 항상 적극적인 면과 소극적인 면이 서로 균형 잡혀 나간다고 한다. 따라서 전국적인 교세와 맞지 않는 현상이 절대로 오래계속하지 않을 것이고 더구나 한언어, 한민족성 또는 비교적 협소한 국토란 한국의 교회를 참작할때 독특하게 예비신자율이 광주대교구에서 증가 되었다는 것이 놀라운 사실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면 전국적인 현상은 예비자수가 금년에 들어와서 감소됐다는 현상인데, 경제적 향상이 돼 간다는 신문보도를 그대로 놓고 따져보면 작년에 비겨 물질적면에 대한 희망이 좀더 예민해지지 않았나고 생각되고 그 만큼 종교적인 가치추구에 관심이 줄어져가고 있다고 볼수 있겠다. 교회의 외적발전이 팽창되고 권리층에 개입되기 시작할때 시간의 경과에 따라 교회내의 흑면이 하나씩 둘씩 비져 나옴으로써 선의의 비신앙자들이 과거 지녔던 교회에 대한 기대나 평가에 어긋나고 있다고도 볼수 있다.
한가지 이유를 든다면 지금 일반 국민 윤리성이 물질과 과학면에 더 많이 쏠리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정당한 오락기관이 결핍되어있고 무비판적이고 신기한 감각적인 외래의 유행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사실이다. 이것은 과거도 그랬지만 날이 갈수록 더 심한 것 같다. 실제생활은 금년이 작년보다 향상 되어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도리어 빈곤층은 더 심각상을 나타내주고 있다.
물론 물질가치 추구에 큰 타격이 생길정도로 사회가 혼란하고 생활이 도탄에 빠져 종교가치 추구에로 관심을 돌릴 수 있으나 어느 지점까지만 이것이 적용되지 빈곤이 과도히 심각해지고 생활에 지쳐 소극적 반발을 하게되면 그 결과 패륜적 생활을 하게되는 자포자기 사상으로 휩쓸리게 된다. 만일 이것이 금년도의 예비자 감소의 원인이라면 앞으로의 전망은 흐릴 것으로 본다.
④연도별 신자수와 연간 증가표에서 현저히 드러나는 것은 58년과 59년이 가장 많은 증가율이다. 이것은 그 당시 정치적으로 보아 가톨릭이 간접적으로 탄압을 받을때였다는 그 점에도 불하고 입교자가 많은 이유는 어떤 종교단체이건 어느정도 외적 세력이 확대되어 그것이 한 단체로서 무시할 수 없게 되었을때, 특히 일반대중은 집권당이 비합리적이고 일반국민의 반감을 사고 있을때 탄압을 받고 있는 가톨릭의 정치 인사를 동정하고 약자에 대한 후원이란 심리에서 반발적으로 생긴 하나의 그 당시 국민심리의 표현이 아닌가 본다.
특히 장면씨를 주로 하는 민주당이 동정을 받고 있은것이 그때 사회환경이었다는 것을 참고해 볼때 이해석이 나오게 된다.
⑤금년도 각 교구 냉담자수 증가율을 작년과 비교해볼때 서울·수원을 제외하고 전국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냉담의 동기는 상세하게는 알수 없으나 단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이 굳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신앙이 약한 이유로서 영세준비의 부족, 영세후의 교리에 관한 무관심과 신앙생활을 실천에 옮기는데 생활의 주위환경이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의 장애가 될때일 것이다. 전국적으로 보아 작년과 금년사이에 그렇게 큰 사회경제적 변동은 없었다. 따라서 환경이 불리하기 때문에 냉담자가 생기는 것은 이유에 맞질 않는다. 그렇다면 상당한 수의 냉담자가 발생하는 것은 영세준비를 소홀히 해서 그냥 영세자수만 늘이거나 기성신자들이 일상생활에 어떤 시간을 이용해서 교리, 심신, 기도 같은 신앙생활에 필요한 지도나 훈련을 받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어떤 일을 하든지 반드시 두가지 요소를 함께 다 행사해야 한다. 알고 안것을 실천할때 그일이 완성된다. 따라서 교리를 계속 연구하지 않으면 자연히 머리속에 __ 개념과 사상이 들어오게되고 그 사상으로 움직이게 된다. 아무리 교리지식이 풍부 하더라도 생활자체를 교리에 맞추어 해나가지 않으면 신앙생활이란 것이 완성한 것으로 발전해 나가지 못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과거 몇년동안 현저히 나타나는 이 냉담자들의 증가 이유는 대체로 이점에 있다고 본다. 특히 이점을 어느정도 비치고 있는 것이 작년도 예비자수와 금년도 대인 영세자수를 비교할때 나타나는 비율이다. 냉담자가 가장 많은 광주가 114.3%, 둘째 춘천이 111.2%인데 이것을 보아 예비자를 빨리 영세시킨 것이 아닌가 추측이 가지만 냉담자수의 순위에 있어 네째를 차지한 대전과 대구는 비율이 85.9%, 77.4%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두교구에서는 그리 쉽게 예비자를 영세 시켰다고 할수 없다. 따라서 전국적으로 냉담자수의 증가 이유로서 한가지를 든다면 기성신자의 지도부족을 들수 있다.
근년도 교세통계분석을 하고 느낀점을 결론으로 솔직하게 말한다면 기성신자를 올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하는데 교회는 좀 더 관심을 가지라는 점이다. 아세아 전역에 걸쳐 연간 입교영세자 수가 많은 나라가 대만·홍콩 그리고 한국이다. 그러나 대만이나 홍콩은 가톨릭 「악숀」이 활발히 전개돼가고 자연 신자들의 일상생활에서 가톨릭적 분위기에 산다는 느낌을 한국신자들 보다 강하게 가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눈에 뛸만한 「악숀」 단체가 몇개 되지 않고 그것도 주로 도시를 중심으로 움직이며 판에 박은듯 고정된 사람만이 참가하고 있다. 일반신자들이 받는 영향이 아주 희박하다. 신자들이 가톨릭신앙생활을 한다는 의식만이라도 가지는 것은 주일날 미사참례이고 정신적 양식은 미사 중에 듣는 강론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각 가정에서 정한 기구를 올리는 이가 몇명이나 되는지 의심날 정도다. 여기서 신앙은 생활의 일부분이지 전체 행동을 주도(主導)하는 원칙은 되지 못한다. 가톨릭자의 힘은 신앙과 애덕이다.
이 두가지로 무장돼 있지 않고 사회안에서 어떻게 동적(動的)인 역할을 할수 있었는가?
그러나 앞으로 신자들과 다른 단체 또는 일반사회와 접촉하는 기회는 점점 짙어져 갈 것은 사실이다. 「바티깐」 공의회가 현대 가톨릭의 사회직접 참여를 강조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쉽게 짐작이 간다. 그러나 참여하고 접촉함으로써 억센 사회물결과 대항하고 그것을 성화하는것 보다 결과적으로는 참여하지 않았을때 보다 더 악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수도 있다. 즉 동적 영향을 주려면 신앙생활을 강하게 함으로써 복잡하고 억세게 흘러가는 현사회 사상을 대항 해가야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가톨릭자의 신앙생활을 관찰할때 사회면에 참여해서 동적인 역할을 할수 있게 전보다 더 새로운 어떤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가하면 그렇지도 않다. 아직도 교직자 자신들의 사목방침은 외적 사회기구에 겨우 맞추어 가는 면이 현저하다. 예를들면 성당을 크게 짓고, 신자의 수를 증가 시키고 자선사업을 영위하고 있는 정도이다.
이것은 어린애를 달래는 방법과 별다른 것이 무엇인가? 이러한 사목방법으로 외교인들을 취급하면 버릇만 나쁘게 만들고 교회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구미에 맞지 않으면 냉담 되어버린다. 차라리 사회와 대면시키지 말아야 더 좋을 것이 아닌지? 이것을 한국의 일반 사회면과 비교해서 볼때 일맥상통 한다. 독립을 갈망하고 그것을 얻었으나 각 사회제도에서 일할 수 있게 훈련된 인재가 결핍됨으로써 모든 면에 진공사태가 생겼고 아무 조예도 없는 이들이 권리를 잡았을때 옳게 못쓰고 남용하게되어 오늘 한국의 고질적 사회가 조성된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교회가 사회에 직접 들어가서 개선하고 성화시켜야할 세계적 사상이 활발해지고 있다.
그러나 주체세력인 우리나라 가톨릭이 먼저 성하 되어야 하며 준비를 간춘 다음에 사회와 대면하고 그것을 성화시킬 수 있다. 금년도 영세자수는 40,640명이다. 그러나 냉담자수는 작년에 비해 4,114명이 더하여 그 누계는 37,245명으로 늘어났다.
이런 장사를 할바에야 그만두는 것이 낫지 않을까? 여기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또 시급한 문제가 기성신자들의 훈련을 위한 교회의 쇄신된 조처이다. 교회 예산도 그냥 입교시키는데만 할당시키지 말고 신자의 옳은 신앙생활을 돕는데 인색해서는 안된다. 이 모양으로 가다가는 불란서의 혁명이후나 구라파의 그것보다 더 험악한 가톨릭교회의 실수를 이나라 이땅에 재연하게 될 것이다. 사회가 비뚤어지게 변화한 것은 그 사상이 옳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개선을 하기전에 교회의 사회원칙과 현대사회 기구를 개선하는데 맞는 방법과 기술을 주입시켜야 한다. 무엇으로 사회에 들어가서 영향을 주겠는가? 행동으로 할려면 먼저 사상을 가져야 할 것이고 사상은 배우고 연구해야 되는 것이다. 기성신자를 가르치고 사상적으로나 기술적으로 훈련시켜서 사회에 내보내라는 것이다.
李甲秀 神父(社會學博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