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알려지지 않은 교회사] 6代孫(대손) 炳奎(병규)씨가 지키고 있으나 碑石(비석)하나 없는 李承薰(이승훈)의 무덤
발행일1965-11-07 [제493호, 4면]
한국천주교회는 1784년 정조 8년 1월 이승훈이 부연사신(赴燕使臣)의 왕래의 틈을 타서 북경에 가서 그라몽 신부에게서 세를 받고 그해 3월에 돌아오는 것으로 교회는 반석(盤石)위에 놓여지게 되었다.
이승훈(베드루)은 한국천주교의 건설을 위해서 또한 초기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로서 많은 공을 세웠다. 시대적인 전환기에서 인간 이승훈은 비록 한때 부친을 비롯한 친척들의 강요로 배교한일이 있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1년후에 다시 회두하여 1801년 2월 26일 서소문 네거리에서 45세를 일기로 참수순교(斬首殉敎)하였으니 그의 구령문제는 오직 천주께 돌리기로 하고 우리 후예들은 그가 남긴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그의 무덤이 인천 반주꼴에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다.
동인천역에서 신천리행 버스를 타고 약20리를 달리면 동쪽에 위치한 마을에 이르는데 이곳이 반주꼴이다.
무덤은 반주꼴에서도 약1「키로」쯤 떨어진 반주꼴 주산 웃등성이에 있는데 산정 1백50고지이나 된다고 할까. 이산은 근방에서도 가장 높은 산인 소래산(蘇萊山)의 한줄기가 동남방으로 뻗어내려 이룩된 것으로서 서방에서 부평(富平) 평야가 연하여있다. 10여년전에는 산림이 욱어져 호랑이가 특실거렸다고 하는데 무덤을 지키고 있는 6대 직손인 이병규(李炳奎)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 이렇게 조상 이승훈의 묘를 모시기까지는 이국규(李國奎) 고조할아버지가 박해가 심할 당시 천주교신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으며 또한 서소문 네거리에 버려진 할아버지(이승훈씨가 국규씨에게 할아버지가 됨)의 시체를 용감하게 밤중에 종 몇 사람과 가서 훔쳐 오다시피 하여 산줄기를 타고 사람들의 눈을 피하면서 호랑이가 득실거리는 높은 산등성이에 모시게 되었는데 머리가 없는 동체만을 묻게 되었답니다』라고 한다.
사실 다른 묘지들은 마을에서 보이는 받듯한 곳에 모두 있었는데 유달리 이승훈의 묘는 때그랑하게 높은 곳에 모셔져 있었다.
이병규씨는 8남매를 거느린 가장으로서 넉넉치 못한 생활을 이어가다보니 조상의 묘지에 비석도 못해놓고 있음이 부끄럽기 한이 없다고 한다.
7년전 인천 답동본당 교우들이 나와서 일일이 돌을 날라 무덤 앞에 축대를 쌓아 올렸는데 이것을 계기로 하여 1년에 봄 가을 두번씩 본당교우들이 나와서 합동연도를 바치고 있음을 알게해 주었는데 마침 필자가 찾아간 그날 도화동 본당 방지거·사베리오 침목단체회원 30여명이 나와서 연도를 바치고 있었다.
후손 이병규씨의 소원은 조상을 기념하는 뜻에서 무덤 앞에 성당이나 아니면 기념강당이라도 지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혹시 무덤을 이장한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는 필자 물음에 그것은 절대로 반대라고 한다.
『조상의 영광을 더 드러내기 위해서 한다고 해도 반대하겠읍니까?』
『그것은 가족회의를 열어봐야 하겠지만 내 개인의 생각으로서는 조상이 물려준 산을 지키는 뜻에서도 무덤을 이장시킬 마음은 없어요』라고 한다.
후손들에 의해서 이승훈의 무덤은 잘 간수되어 가고 있지만 비석도 하나없고 아무런 표찰도 없는 무덤이 매우 쓸쓸했을 뿐이다.
그의 구령을 위해서 열심히 기구할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