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우리 안에서] 교우의 司祭(사제) 訪問(방문)
발행일1966-11-13 [제543호, 4면]
■ 神父의 意見 - 김몽은 신부
영신보다 물질적 청구 많아
接客에 무뚝뚝해선 안돼
일반적으로 신자가 사제관을 찾는다는 것은 일종의 「대화」를 말한다. 사제직의 본질이 신자들의 사주구령에 있는만큼 사제들은 항상 문을 두드리는 신자들을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같이 사제 한 사람에 3천여명(대방동의 경우)이 달려 있으니 각 신자들의 영신적인 사정을 개별적으로 지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불행히도 찾아오는 신자들 중에는 대부분이 영신적인 문제가 아니라 물질적인 이야기, 에를 들면 『구제품 좀 주십시요!』라든가 『가정이 몹시 곤난하니 돈 좀 들려주십시요!』 하는 육신적인 이야기만을 한다.
대개 이러한 사람들은 어리를 갸웃둥 하고 거짓 겸손을 표시하지만 사제는 즉시 알아채릴 수 있다 도 말 상대로서 사제고나을 찾는 사람도 있다. 살다보면 자질구레한 잔 근심들이 많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면 각자는 이것을 참아받지 못하고 사제를 찾아와 이렇쿵 저렇쿵 두서없는 넉두리를 털어놓는다. 위로를 받자는 심산이다. 그렇다고 사제가 중도에 내쫓을 수는 없다. 물론 적당히 즉 각 사제들의 「테크닉」에 의해서 보내기도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신자들이 사제라는 개념을 아직 깨닫지 못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리라.
또 사제는 온종일 앉아서 신자들만을 기다릴 수 없다. 인간인 이상 잠도 자야 하고, 성무(聖務)도 처리해야 하고 많은 단체에 쫓아다녀야 한다. 또 공부도 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필자의 경우) 강사인 사제는 강의를 함은 물론이고 이에 따른 준비를 해야한다. 그러니까 일정한 방문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제들을 찾기 전에 측근자에게 언제 방문하는 것이 좋겠는가를 미리 알아둠이 좋겠다 또 밤늦게 찾아 오는 것은 삼가야 하겠다. 특히 독신생활을 하는 사제들에게 뒤늦게 여성이 방문한다는 것은 힐책을 받기 쉽다.
그러나 신자들은 사제와 가까이 해야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야만 사목활동에 있어서 알맞는 방법을 제시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사제는 너무 무뚝뚝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서 점잖만 부려서는 안된다. 적극적으로 교우들을 방문해야 한다. 이것은 필자의 생각이지만 종전의 사목에 대한 개념은 수동적인 반면 즉 『교우들이여 찾아오시오!』와 반대로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찾아오는 사람을 만나고 또 방문을 사제가 해야된다.
신자들은 가끔 이런 말을 한다. 『우리 본당 신부님은 무섭고 무뚝뚝해!』 그러나 이러한 성격 관계로 영신상의 문제를 의논하려는 신자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면 …한 가정에서 아들의 고통을 아버지가 무섭고 봉건적이라는 이유로 말할 수 없다면 이 가정의 부자(父子)의 도는 없어지고 만다. 사제와 신자와의 사이도 이와같다. 사제는 영신상의 아버지요 신자는 그 자녀들이다. 그러니까 영신 문제가 생겼을 때에 서슴치 말고 사제관을 찾아주기 바라는 마음 이 또한 주님의 마음이다.
■ 信者의 意見
신부 · 신자의 대화 당연하나
妄動된 여교우들 自覺해야
대체 평신자가 신부를 찾아가는데 무슨 논란의 여지가 있단 말인가? 평신도가 신부를 찾아간다는 것은 올바른 신앙생활을 이룩해 나가는데 있어서 너무나 당연한 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살이는 모든 것이, 원리 원칙대로만 되어가는 것이 아닌성 싶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 왈가 왈부 논란의 대상으로 등장하게 되니 말이다.
사실 신자가 신부를 찾는 것은 영신적인 지도를 바라고 마음의 양식을 얻기 위해서 당연히 권장해야 할 일이다. 그러기 위해 신부와 신자의 「대화」 가 자주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우리 신자들도 한 사회를 이룩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질서있는 생활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신자가 신부를 찾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이렇게 논란의 대상이 됨은 아마 이따끔씩 질서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탓이 아닌가 싶다.
환자를 위해서 병원 문이 항상 열려있어야만 신부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흔히 신부를 말할 때에 『영혼의 아버지』라고 한다. 그러나 신부는 영혼의 아버지로서 그칠 것이 아니라, 육신의 아버지로서, 형제로서 친구로서 스승으로서 신자들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싶다.
여기서 특별히 다루어져야 할 문제는 여자 교우의 사제관 출입니다. 예외적인 일이긴 하지만 신부를 신부로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보이 프렌드」 정도로 생각하고 찾아다니는 사례가 더러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도 「마음의 벗」 영신의 위안을 얻으려고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독신생활을 하는 성직자를 유혹하려는 눈치 마저 보이고 있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망동이 아닐 수 없다.
교리상으로도 유혹을 당하는 것은 죄가 될 수 없으며, 도리어 그것을 쳐 이김으로써 공로를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신부도 평신도와 꼭같은 五官을 가지고 있는 이상, 간혹 유혹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다볼 필요가 있다. 이런 점을 자각하여 여교우들은 특히 몸가짐을 각별히 조심해야 하고 남에게 오해를 받기 쉬운 『심야의 사제관 방문』 같은 것을 삼가야 할 줄로 안다.
이런 문제뿐 아니라 간악한 일부 평신도의 꼬임에 빠져 세속적인 거래를 하다가 곤난을 겪고 있는 성직자도 있음을 볼 때 신부나 평신도, 다 같이 소관 사업 이외의 부분에 손을 대려는 욕심은 부리지 않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