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秘體(신비체)가 中傷(중상)될까해서 典禮改革(전례개혁)에 異意(이의)있다 (上)
信者(신자) 向(향)한 미사 規式(규식)서 非傳統(비전통) · 非正常的(비정상적)인 것과 傳統(전통) · 正常的(정상적)인 것이 顛倒(전도)
대부분의 천사들의 마음에서 하느님이 말살됐고 자기중심으로 돋아나는 오만의 우상신이 머리를 치켜들기 시작할 때 미카엘 대천사가 동료들과 더불어 루치펠 일당을 거스려 결사투쟁함으로써 참 평화를 이룩한 그 세계가 우리시대의 세계와 비슷한 느낌이 듭니다 .
이러한 시대일수록 우리는 어린이 천사이 눈으로 하느님의 얼굴을 항상 뵈옵기 위해서(마테오 18장 참조) 천주님의 상과 말씀과 맘씨를 항상 묵상할 뿐 아니라 우리끼리의 상통과 이해와 일치를 위해서 항상 대화해야 한다는 것도 공의회의 정신인가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문제점들 중에 가장 구체적이고 날마다 우리에게 부닥치는 것은 전례문제라고 하겠읍니다. 그중에도 가장 논쟁과 대립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은 제대의 위치, 사제의 위치 및 그와 관련된 것들이라고 하겠읍니다.
즉 백성을 상대로 하고 백성을 위해서 해야 하는 「말씀의 전례」가 끝난 다음 하느님의 대명사로서 큰글자로 시작하는 「TE IGITUR…」부터 천주 예수 그리스도와 백성들 사이의 중개자인 사제가 백성들과 함께 신주의 위치, 즉 전례적으로 천주를 상징하는 십자고상을(제대위의 감실위의 소고상과 제대뒤에 높이 모셔야할 큰 고상) 향하느냐 혹은 백성을 향하느냐 하는 문제이겠읍니다.
하나는 오랜 전통을 가진 것으로서 천주께 흠숭과 찬미와 제사를 드리고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은혜 즉 영혼의 양식인 그리스도를 사제가 받아모시고 백성들에게도 나눠줌으로써 신비적 잔치를 한다는 뜻에 치중하는 자세라 하겠고 다른 하나는 공의회 이래 요사이 세계를 휩쓰는 「붐」으로서 제대를 중심으로 하는 회합, 잔치, 능동적 참여를 더욱 돕기위한 시각적 참여 및 인분적 포교 등의 뜻에 치중하는 자세라 하겠지요.
여기다가 조금 해석을 가한다면 첫째경우에 있어서는 제사의 본질, 잔치, 회합 또는 공동기도 및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교훈의 의미 등이 중재자로서의 사제가 때로는 교우들을 향하고 때로는 천주를 향하는 전례적 조화로 잘 나타날 뿐 아니라 가장 대중적인 신심으로부터 가장 고상하고 심오한 신부에 이르기까지의 그리스도의 인간적이고 천주적인 모든 면이 각자의 마음의 준비에 따라 단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둘째 즉 교우들을 향하는 경우에는 회합, 잔치, 교훈 및 시각만족 등의 부연은 잘 나타나지만 다같이 천주를 향해서 흠숭과 제사를 드린다는 부면은 적어도 우리에게 이어서 너무나 많이 위축되고 따라서 고상한 신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큰 지장이 된다고 보입니다.
(천주는 무소부재하시니까 방향은 관계없다는 말은 결국 전례도 필요없다는 뜻이 되겠지요』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했고 또 위에 말한 미사성제의 전례적 의의를 손상시키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는 여러가지 문제가 남아있지 않읍니까? 예를 들면 십자고상의 위치와 전체의 중심과 표적같은 것이겠읍니다. 십자고상은 제대위에 있는 것도 제대 뒤에 있는 고상도 절반의 역할밖에 못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대가 회합의 중심이라고 하지마는 실제로는 이 경우에 사제의 얼굴이나 동작 또는 좌석이 교우들의 목표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제가 여기서 대화하고저 하는 것은 이와같은 이념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것은 언제나 서로 다를 수 있겠지요. 저의 문제는 근본적이고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있어서 중대한 문제입니다. 즉 교회 내의 분열과 일치, 성장과 마비, 또는 생명과 죽음을 좌우하는 것에 속했다고 해야하겠지요. 즉 그리스도의 신비체가 효과적으로 활동하기 위하여 필요한 유기적 단일성에서 오는 머리와 지체 및 지체와 지체간의 통합의 방법입니다.
교우를 향하는 것과 천주를 향하는 경우를 두고 말해봅시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진행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겠읍니까? 교회의 모든 공식 운영이 그렇거니와 특히 전례를 조절할 권한은 법의 규정에 따라 한정된 범위 내의 권한이 주교 및 주교단에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오직 교회의 권위인 교종청에만 있는 만큼 그 규정을 좀 세밀히 살펴보기로 합니다.
정상적 미사의 정상적 규칙인 현행 미사 규칙에 의하면 사제는 적어도 「전문」(典文=까논)부터는 백성과 제대사이에 서서 고상을 향해서 미사를 계속하도록 되어있으며 제대를 가운데 두고 백성을 향하여 드리는 미사에 대하여는 일언반구도 없지 않습니까? 다른 교서들에도 직접으로 그것을 허용됐다는 문구는 없습니다. 다만 간접으로 허용했거나 허용될 것으로 엿보이는 말 구절이 제대와 감실의 설치에 대한 언급중에 있는 것 뿐입니다. 즉 주로 현행미사규칙 보다 4개월 먼저 발행된 훈시서 91절에 『본 제대는 벽과 제대 사이를 쉽게 지나다닐 수 있고 또 거기서 백성을 향해서 미사도 드릴 수 있도록 벽에서 조금 띄어서 설치하는 것이 더욱 좋다』고 되어 있읍니다.
그런데 여기서 밝혀야 할 것은 「PRAESTAT」은 더 좋다는 것이지 의무가 아니며(다른 것은 다 의무임에도 불구하고) 또 제대를 벽에서 조금 띄어 놓는 것이 더 좋단 말이지 반드시 언제나 거기서 미사드리는 것이 이쪽에서 드리는 것보다 더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UT PERAGATUR」하지 않고 「UT PERAGI POSSIT」함으로써 가끔 또는 드리고 싶은 분에게 백성들을 향한 미사의 가능성을 주는 제대가 더 좋다는 뜻이 아닐까요? 뿐만 아니라 이 경우에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규정이 그대로 살아있는 만큼 어느쪽에서나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제대를 만드는 것이 원칙적이지요. 왜냐하면 비정상적인 것의 가능성을 주기 위해서 정상적인 것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법리에도 상식에도 어긋나지 않습니까?
이러한 원칙들에 비춰본다면 일교구위원회 같은데서 『「로마」의식이 예절규칙에 의해서는 사제가 제대에서 취할 위치는 백성을 등지는 것과 백성을 향하는 두가지가 허용되어 있다. 집전자가 백성을 향할 때에 미사 성제는 대화이며 식사이다란 것이 더욱 나타난다. (CONSTITUTIO 48절 인용) 이것은 집전자와 백성 사이의 더욱 직접적인 상통을 허용하며 또 백성들이 시각적으로 더욱 잘 참여함을 허용한다. 이러한 사목적 이유들은 가능하기만 하면 미사는 백성을 향해서 드리는 것이 더욱 좋은 것이라고 말해준다.
일률성을 위해서 모든 성당은 백성을 향하는 제대를 가지도록 개조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는 바이다.』 등의 생각이나 운동은 재고려되었으면 좋겠읍니다. - 계속 -
尹良碩 신부(예수會員, 大建大神學校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