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1월에는 추사이망 첨례를 필두로 연령성월이 시작된다.
본당에서는 합동연미사가 거행되고 죽은친척을 찾아 교회묘지에 모여든 신자들은 죽은이의 천국에의 입국을 재촉하는듯 꽤 긴 연도문을 외우며 천주님의 자비를 애원한다. 띄어띄엄 몇명씩 모여앉아 구성진 음성으로 천주님의 특사(特赦)를 간칭하는 그들은 자기들 앞에 고이 누워있는 죽은 친척의 영혼이 적어도 연옥에는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죽은이의 구령과 행복에 관하여 얼른 단념해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주께서 바라고 믿었으며」 천주님의 뜻을 거역할까 항시 의심하던 이에 대한 걱정이야 하지 않는다. 그렇지 못하고 흐미한 신자생활을 했고 뚜렷한 통회의 내색도 없이 숨이 지내고만 친척의 영혼도 그 넓은 천주님의 자비가 푹 덮어 주었을 것을 바란다. 그들은 영혼을 유유히 따라오는 천상의 엽견(엽犬)이신 천주님의 신비스러운 지혜와 진홍색 같은 죄악이라도 눈같이 희게하실 폭넓은 자비에 기대한다. 죽은 이의 와거를 결산해 보면 그이의 천국에서 직행을 자신하지 못하면서도 그이의 구령을 바라는 마음은 천국과 지옥 중간지점에 연옥이 있다는제 이유를 둔다. 연옥은 항시 우월하고 싶어하면서도 나약한 인간에게 얼마나 다행하고 편리한 곳인지 모른다.
각 사람이 인생 종착점이 천국인지 지옥인지 미리 아시는 천주에게 사람들이 당하는 불행의 책임이 있지 않느냐고 꼬집는 인간들의 좁은 소견에 천주님의 참의도를 웅변적으로 명시하는 것은 바로 연옥이다.
천주님은 사람들의 구원을 원하셨지만 또한 사람이 무엇인지도 잘 아셨다. 소소한 결함이나 자질구레한 실수를 숱하게 저질지 않고는 하루 해를 넘기지 못하는 사람에게 천국과 지옥만 둔다는 것은 분수에 너무 겨운 것이었다. 사람의 속을 다 아시고 모든 사람을 날 때부터 죽음의 날까지 다 알고 계신 천주님은 그들을 구해보고자 얼마나 생각을 많이 하셨던가? 연옥은 천주의 지혜와 자비의 상징이고 인간들의 능력을 설명하는 척도이다. 그래서 우리는 연옥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연옥을 두셨음에 감사한다. 소년 시절보다 현재 연옥은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이며 지금보다 죽음의 시기에는 더욱 필요한 것이다. 연옥영혼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도 그렇다. 연옥영혼들의 석방을 비는 우리의 행동은 오로지 그들만을 위하는 선심의 발로라고만 생각할 것은 아니다. 물론 우리가 연령을 위해서 기도함으로서 그들의 고통을 삭감해주고 싸우는 교회와 단련의 교회와 승리의 교회간에 유대가 더욱 두터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희생을 하고 인내 보속 사랑의 덕을 실천하면 우리 가련한 영혼이 성화될 뿐 아니라 남의 영혼에게도 혜택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기쁨을 주는 교회이다. 그러면서도 연령을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사랑의 요청이기 전에 정의의 요청이라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들이 긴 연옥의 단련을 견디어야 한다는 것에 애처로운 심정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내 과거에는 그들의 죄를 확대했을 내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기구해주는 그이의 벌을 더 무겁게 하고 단련의 기간을 연장한 자가 우리일 수 있는 것이다. 울리의 태만이나 나쁜감화가 없었다면 연옥에 있는 영혼의 죄가 더 적었을지도 모를 일이며 더 높은 인격에 도달하였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천주의 심판ㄷ개에 서게 되었을 때 자기친구나 친척의 죄상의 적어도 일부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지 않을자 누구냐? 그들이 지금도 여전히 연옥에서 괴로워하고 있다면 그 책임의 일부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냐?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하여 그들의 벌을 완화할 것이 아니냐? 우리의 희생과 기도와 보속이 부족하면 그리스도와 성모마리아와 성인들이 마련한 무진장의 공로창고가 있지 않느냐? 어서 바닥이 드러나지 않을 이 공로의 창고의 문을 열고 우선 책임을 모면하고 그다음에 선심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吳庚煥 신부(인천 화수동본당 보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