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敎實話(전교실화)] 길 잃은 양을 위해 (18) 間諜(간첩)의 버리지 못한 唯物論(유물론)
발행일1966-11-27 [제545호, 2면]
고개를 넘으면 평원이 있다. 그리고 평원을 지나면 언덕이 닥쳐오지 않으리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여기 고배의 잔을 마시게 한 자가 있으니 그는 당년 40세의 간첩 김석관이다.
고향은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삼만리이고 주소는 담양읍 객사리였다.
그는 1939년에 금성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8세가 되던 1944년 겨울에 고향마을에 있는 오씨댁 딸인 오앵도(가명)라는 여인과 결혼했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두 아들까지 얻고는 17년간의 부부생활을 청산하고 이혼하고 말았다. 이것도 그에게 필연적인 응보의 결과인지 모른다.
그는 천성이 괴팍한데다가 공산주의사상이 깊이 뿌리박힌 비사교적인 악랄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6·25동란이 발발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들고 일어나 1950년 7월 23일경 북괴치하 지방자체로 조직된 거면(居面) 보안대원에 가입하여 수일동안 근무하다가 같은 7월말경에 거면분주소 부소장이란 감투를 쓰고 날쳤다. 9월말엔 광주시에 있는 서석(瑞石)국민학교 내에서 근 열흘간의 공산주의 교육을 받고 돌아온 그는 즉시 분주소 소장으로 임명되어 살기 등등해진 그는 갖은 만행과 수없는 양민들을 학살한 살인 지휘자였다.
이렇게 기세등등하게 돌아다니던 그는 전세(戰勢)가 기울어지자 그해 9월 20일경 그곳 금성산에 입산하여 유격대 제3소대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날뛰다가 드디어 1951년 3월경 사을 내려올때까지 조선 노동당 거면당 선전책으로 맹활약하던 열렬한 「빨치산」이었다.
윤형중 신부님은 다섯번이나 그를 방문했고 나역시 여러차례를 거쳐 대화했으나 그의 강철같은 마음은 얼음장 같이 냉랭하고 끝내 자기의 모순에 대해 일말의 회의조차도 없었다.
『…그러니까 종교란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지요. 즉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절대완전자인 신을 인정하고 인간이 신에대하여 마땅히 바쳐야 할 공경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신의 존재를 무얼로 증명합니까?』
『그야 간단하지요 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다윈의 진화론에선 생명의 근원이란 어디까지 「아메바」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읍니까?』
『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체(肢體)에 놓인 부분적인 지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실로 천주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마치 작은 그릇에 바닷물을 전부 퍼 넣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이며 미소한 개미가 저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이해하려는 것과 같이 어려운 것이지요. 불완전한 감각을 가진 인간은 꼭 자신의 눈으로 보아야만 믿겠다는 그 어리석은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천주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럼 이 「아메바」의 창조주는 누구인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그야 「아메바」란 어디까지나 물리적인 변화에 의한 자연발생의 물질이 아닙니까? 이와같이 보편타당성이 있는 문제를 어떤 신화적인 특수한 문제와 결부시킨다는 것은 좀 무리가 아니겠읍니까? 신화(神話)란 어디까지나 인간이 설정한 가상(假想)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까요』
『모르시는 말씀. 이것은 신화도 아니요 가상도 아닌 어디까지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