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자연생명의 完全한 파괴이며 영구적인 終末이다. 죽음으로 현세적인 모든 것 행복도 불행도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미움도 完全히 끝나고 만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을 무서워하고 혐오한다. 그리고 他人의 죽음을 목격하든지 자신의 죽음을 생각할 때 不安을 느끼게 된다.
현세적으로 享樂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할 것이다.
■ 죽음은 두려운 것
그러나 죽음이 우리 마음을 不安케 하는 것은 죽음이 自然的인 모든 선을 앗아가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죽은 후에 닥쳐올 운명이 不安의 더 큰 원인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사람답게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세상」에 대하여 거의 先天的으로 생각할 것이니 말이다. 神을 否認하고 영혼의 不死性을 否定하는 無神論者들과 唯物論者들 現世界만이 유일한 現實이라고 주장하는 現世主義者들과 內在主義者들, 이들 역시 죽음을 대면할 때 不安을 느낄 것임에 틀림없다. 아마 다른 사람들 보다 더 큰 不安을 느낄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기들의 主張을 立證하기 위하여 神과 영혼에 대하여 그리고 「후세에」 대하여 더많은 熟考를 할 것이니 말이다. 지난 世紀에 西歐에서는 無神論이 한참 流行하였다 이때 어떤 젊은이들은 神이 없다는 것과 죽음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自殺로써 증명하려 하였다 한다. 그 용기는 대단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치광이 짓이지 正常的인 人間의 행동이라고는 볼 수 없다.
또 現世적인 고통 고민 혹 불행을 끝내기 위하여 自殺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똑똑한 意識을 가지고 행동한다면 不安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슬픔에 잠긴 젊은 붸르테르의 경우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죽음이란 휘장을 제치고 저편을 한번 보면 다시는 뒷걸음질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 죽음은 可能한 實存의 完成
人間은 自由로운 存在다. 자기자신에 대해서 충실할 수도 있고 자신을 背信할 수도 있다. 항상 善을 추구할 수도 있으며 맹목적인 慾望을 追從할 수도 있다. 마음 깊은 속에 항상 순결한 사랑을 간직하고 사랑의 눈길로 만사를 대할 수도 있으며 증오심을 가지고 파괴만을 일삼을 수도 있다. 이와같이 當爲와 慾望의 틈바구니에서 간단없이 선택을 强要당하는 것이 또한 人間이기도 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육신과 함께 人間의 영성도 자라난다. 물론 제대로 자라나지 못하고 일그러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뿐만 아니라 야수적인 本能 밖에 다른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는 人間도 있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當爲를 실현하여 神의 神秘를 반영해 주는 聖스러운 人間도 있다. 그런데 죽기 前가지는 언제든지 한 모습에서 다른 모습으로 변해 갈 수 있다. 이것이 人間에게 위탁된 自由의 神秘이다.
그런데 죽음으로써 이 可能性은 다시는 뜯어고칠 수 없도록 完成된다. 完成이라 해서 完全性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되었으면 잘못된 대로의 完成이다. 말하자면 죽음으로써 이 地上生活의 總合算으로서의 永遠不變의 「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 죽는 순간은 神과의 상봉의 순간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곧잘 한다. 『천당이나 지옥엘 누가 가봤나? 죽어봐야 알지!』 진짜 죽어 봤고 가 본 사람이 있다면 아마 사람들은 깜짝 놀랄 것이다. 그런 분이 꼭 한 분 계시다. 즉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태어나시기 전에 벌써 「저세상」에 계셨고 영원으로부터 계셨다. 이세상에 살으시던 동안 「저세상」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직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성부여 내 영혼을 네 손에 맡기나이다』(누가 23의 46) 이 예수께서 돌아가신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시어 당신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여러가지 모양으로 명백히 알려 주시고 이어 저 영원한 현실계로 올라가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 하셨다. 『내 성부시며 너희 성부이시요 내 천주시며 내 천주시며 너희 천주께로 올라 가노라』(요왕 20의 17) - 물론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자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믿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무엇인지 또 「저세상」이 어떤 것인지 어느정도 알 수 있다. -죽음은 다른 것이 아니라(-自然的인 生命의 完全한 파괴임에 틀림 없으며 可能한 實存의 完成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스스로 생명을 가지신 분(요왕 5의 26) 創造主이신 神, 우리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관문이다. 그것은 眞理自體 善自體이신 天主와의 相逢의 순간이다. 항상 우리에게 가까운 것 같으면서도 멀고 항상 親近한 것 같으면서도 항상 낯선듯한 그분, 우리 日常生活의 각 순간을 동반해 주시던 그분을 만나 뵙는 순간이며 항상 우리에게 속삭이시면서도 永遠한 침묵중에 계시던 그분의 그리운 목소리를 듣는 순간이다. 『좋다 착하고 충직한 종아 네 주의 즐거움에 들어오라!』 (마테오 25의 23) 하시는 말씀을 듣는 순간이다.
崔昌成 神父(哲博 · 칠곡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