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우리 안에서] 고해
발행일1966-12-04 [제546호, 4면]
■ 神父의 意見 - 尹光濟 神父(大邱 曉星女中校長)
판공의 군중적 무질서에 고해신부 과민과로로 風船의 末路 겪지 않도록
사실 고해성사에 대해서 필요한 대화가 많으리라 믿는다. 고해성사는 사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존성총을 다시 얻고 또한 새로운 조력성총으로 앞으로 있을 죄의 기회를 이기는 힘을 얻기 때문에 고해자는 먼저 알뜰한 성찰과 통회는 물론 개선의 결심을 굳히며 부적당한 환경에서 오는 방심을 막고 곱개에 임해야 할 것이며 고해신부는 소해자에게 사죄경(赦罪經)뿐 아니라 적절한 지도조언을 해야 한다는 것은 조력성총의 증가에 필요한 것이다.
수도자나 열심교우의 경우 고백이 고죄일변도가 아닌 수덕지침(修德指針)의 요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고해보다는 시간이 많이 소모되기 마련이어서 고해자도 무리가 없는 시간에 청해야 할 것이고 고해신부도 시간을 미리 지시해 주는 것이 서로가 편리하고 지도가 효과적일 게다.
이상의 고해를 특별고해라 가칭한다면 그 이외의 고해, 일반 고해에 있어서 지도충고의 문제는 역시 고해자의 인성(人性) 경력(經歷) 환경이 고해신부에게 잘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고 또 보통으로 폭주하는 시간에 휩쓸려서 성사를 보기 때문에 개별적 훈계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일반적인 훈계로 그치는 수도 많으나 그정도라도 고해자에게는 큰 자극을 주는 때가 많기 때문에 부득이한 경우나 고해자가 수용태세가 결여한 때를 제외하고는 짧은 일반적 충고라도 꼭 있어야 한다는 결론엔 이의가 없는 것이다.
우리 교회의 현실에서 고해의 「골든 타임」이 있다. 판공막바지, 큰 첨례전날, 특별행사 전날 등, 그래서 그런날 본당에서 미리 준비도 한다. 또 그런 기회에 많은 고해자가 있다는 것이 자랑거리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에 좀 개선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것 두가지가 있다.
먼저는 이 「골든 타임」을 이용하는 신자들이 질서감을 가져야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붐비는 시간의 행동은 군중적이기 때문에 서로의 질서감이 없을 때, 나아가서는 성사와 존엄성마저 해치는 것 같다. 소란으로 인한 마음준비의 소홀, 장시간 대기에서 오는 권태증, 때로 남에게 실례를 범하는 이기심 이런 것은 다분히 다소 마음이 진정된 고해대기자에게도 주의력을 산만하게 만들고 또한 해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고해신부의 집장을 좀 양찰해서 고충을 더는데 협력해달라는 것이다.
ㅂ노당사목자의 입장에서 판공성사 때나 기타 폭주한 고해자가 예상될 때에 일정한 시일이 배정공고되고 거기다 기일 엄수란 단서까지 붙어있었지만 번번이 이행이 안되는 형편이며 결과적으로는 막바지에 집중하고 만다. 대축일을 앞두고 고해성사 외에도 마음쓸 곳도 많고 또 할 일도 많다. 그런데도 대축일 전에는 식사시간마저 앗아가는, 심야까지 지속되는 그래도 짜증한번 내어서 안되는 고해신부, 그래서 기계적으로 큰 첨례를 지나치는 과민과로의 그가 상승일로로 다름질치는 불쾌지수를 겉잡지 못해 때로 고무풍선의 말로를 드러내는 실수가 있더라도 관용을 바라고 이것을 미리 방지할 수 있는 이해와 통찰과 공시의 순응을 앞세워 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애원한다.
■ 信者의 意見 - 宣君星(曉大 敎授)
醫師처럼 직업적이 아닌 만족한 훈계와 자애로서 告解염증 갖지 않게 해야
우리 인간은 육신의 병에 걸리면 먼저 의사에게 찾아간다. 그리고 환자는 의사에게 자신의 병세를 과장하면서까지 설명한다. 아마도 그와같은 심리는 환자가 느끼고 있는 고통을 의사도 같이 느껴주도록 바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사도 역시 인간인 이상 하고 많은 환자들의 우울한 얘기를 수없이 들어왔기에 경우에 따라서는 친절과 위로를 만족할 만큼 주지 못할 때도 있을 것이나 그러면서도 자신의 직업의식으로 표면상 치료나 지시를 해준다. 여기에 환자는 그 의사의 요구대로 값을 치르고 친절하다 혹은 불친절하다고 평하게 된다.
여기에 비해서 아무 댓가 없이 추울때나 더울 때를 불문하고 한결 같이 영혼의 병을 고쳐주려는 신부님들의 노고에 우리 교우는 다만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우리의 죄를 신부에게 고한다는 것은 고해서에선 바로 죄인 자신이 원고가 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또한 위로가 되기도 한다. 세속재판(世俗裁判)에서는 범인은 가급적 자기의 죄를 숨기려고 하고 검사는 될 수 있는대로 죄를 쥐저 내려고 하는 것에 비한다면 고해재판에서는 죄인 자신이 검사가 되고 또한 당사자가 스스로 죄를 정확히 조사하여 자수해서 진정으로 고백하면 무슨 죄든지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명예스러운 일이냐?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죄를 고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줄 알면서도 신부란 개인적 인격을 떠나 인자하신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만 죄를 듣고 사할 수 있다는 것과 신부에게 죄를 고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에게 고하는 것이 된다고 믿기 때문에 떳떳이 고해소로 나아가는 것이다.
『문답』(264)에서 『고명은 겨손하고 정직하게 하여야 하나니 쓸때없는 말과 핑계를 말지니라』고 명시했다. 이것은 바로 고해의 목적이 고해자로 하여금 새로운 걱정과 마음의 불안을 꺼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너희는 평안할 지어라』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모든 영혼의 고해성사를 타당히 받음으로써 사면(赦免)되어 천주님과 화해하며 마음속에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믿는 것이다. 한 죄인의 회개함을 하늘에서 즐거워 하는 것은 회개의 필요가 없는 아흔아홉의 의인에 비해서 더하다고 하셨고(루가 5·3-7)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 탕자의 비유로서도 능히 자기 죄를 뉘우치며 죄사함을 구하는 자에게만 예수님께서 죄를 사해주신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간혹 고해신부를 의사에 비교하여 평하는 수가 있는데 앞에서 만한 바와 같이 신부는 인격이 아닌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보았다면 결코 평해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신부님들도 제한된 시간에 수많은 교우에게 일일이 만족한 훈계를 하실 수 없을 줄로 안다. 다만 좀더 통회 · 정개의 정을 발할 수 있도록 한 말씀이라도 더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든 고해자의 원이며 그것은 또한 다음 고해의 기회를 미루지 말게 되는 계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