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한국) 進出(진출) 40周年(주년) 맞는 布敎(포교) 聖(성) 베네딕도 修女會(수녀회)
가시밭 布教(포교)길
韓日合併(한일합병) 소용돌이 속에 첫 進出者(진출자) 中(중) 唯一(유일)한 生存者(생존자)는 「크」修女(수녀)뿐
이젠 百(백)82명의 大家族(대가족), 敎育(교육) 事業(사업) 計畫(계화)
■入國
지금으로부터 만10년전 즉 1925년 11월 21일 4명의 성 베네딕도회 전교수녀들이 독일로부터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입국하였다. 지구의 반을 완전히 돌아서 해뜨는 고요한 아침을 상징하는 이 땅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파견의 십자가를 가슴에 품고 『이것만이 유일한 무기』 이렇게 뇌이면서. 40년전이란 벌써 옛날이다.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사회기구의 개혁이 좀 이루어져 이 4인의 선구자들이 들어올때 쯤은 호랑이 담배피울 때의 옛날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채로운 풍경에 경악하여 마지아니했을 것은 불문가지!
더욱 연속적으로 일어났던 국가적 불운으로 빈곤과 불안이 뒤덮고 있던 때였으니 더 말할 여지도 없다. 무수한 어려움을 계산에 넣을 사이도 없이 주께서 주신 과업을 닥치는 대로 수행하기에 고운청춘을 고스란이 바친 것이다. 온갖 세속적인 권력을 초월하여 사랑과 평화만이 다스리는 진리의 나라를 우리민족에게 전하려고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까지 잊은 채 왔던 것이다. 신대륙 발견 후 황금광(黃金狂) 왕들이 구주에서 미주로 질주하였고 이어서 정치인 기타 세속적인 것을 목적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아프리카 아세아의 여러 영역으로 사선을 넘어가며 황무하였다는 사실을 역사는 말해 주는데, 이모든 인상들과 전교사들은! 다같이 고국을 버리고 낯선길로 나섰지만 그들의 지향(志向)을 음미할때 전교사들의 고결함과 아름다움에는 그냥 부복하게 된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고 영원한 것과 현세적인 것의 차이이기에.
한국에 복음의 씨가 심겨진 것은 18세기후 반기였지만 백년간의 박해로 겨우 19세기 후반기에 이르러서 교회는 지상으로 나오게 되었고 전교사들의 입국도 쉽게 되었으며 여전교자로서는 바오로회수녀들이 불국으로 부터 이 땅으로 첫발은 옮겨 놓았던 것이다.
우리회는 이보다 훨씬 뒤져서 들어왔다.
독일에 있는 「쌍트·오틸리엔」관구, 전교 성 베네딕도회 관자 수도단체는 우리보다 앞서 북한에 있는 덕원에 전교기지를 두고 활약하던 중 수녀들의 조력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을 간파하여 당시 원장이었던 신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께서 우리회를 초청하였던 것이다.
4인의 첫 수녀들이 자리잡은 곳은 원산이었다. 이 선구자들 중에서 지금껏 유일한 생존자로 남아계시는 공경하올 크리소스토마 수녀님에게는 40돌 맞이 날이 가일층 의의가 있으리라. 70의 고령을 훨씬 넘어 몸은 비록 세상에 계시지만 영신은 저 피안, 영원한 복음 속에 사시며 무수한 고난인들 아랑곳없이 평화로운 미소로 우리 후배들을 고요히 고무하고 계신다.
■ 北韓에서
원산에서의 초라한 첫출발과 그후 얼마되지 않아 퍼지기 시작한 가지들, 그리고 연이어 겪어야했던 전쟁, 공산치하의 공포 수녀원 몰수, 체포, 강제노동 등을 회고해 본다. 필자는 남한에서 입회하였으므로 이 모든 사실을 선배수녀님들로 부터 구전(口傳)으로 들었을 뿐이라 피상적인 감을 면치 못한 채 그냥 글을 계속한다.
성 베네딕도회의 「슬로간」은 『기구하라, 그리고 인하라』이기에 기구는 모든 것에 앞섰지만 기구외 그들에게는 전교수녀로서의 사명이 있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군은 너무도 적었다.』 그래서 얼마후 즉시 방인수녀의 양성에 진력하였고 독일에 있는 모원으로부터 인적인 도움을 받으면서 이 처녀지의 개간을 끈기있게 진척해 나갔던 것이다. 청진 회령 고산 함흥 등지에 분원이 건립되고 본원인 원산에는 빈민자녀들을 위한 급비생(給費生) 학교와 보통가정의 자녀들을 위한 국민학교가 세워졌으며 이에 유치원도 부족 되었다.
조그마한 진료소도 열어 애덕사업을 맡았었다.
당시는 세계전체가 긴장상태에 있었으므로 여러 난관을 극복해야했고 은근한 압박을 당해야 했지만 전교사업은 비교적 잘되었다. 종전 후에는 공산치하에서 떨면서 언제고 한번 닥칠 벼락을 예상하면서 주께서 주신 파견지를 끝까지 지켰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전교사업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드디어 벼락은 내리고야 말았다. 1949년 5월 11일 수녀들은 체포되고 수녀원은 몰수되었다. 한인(韓人)수녀들은 얼마간의 옥살이후 석방되었고 독일수녀들은 한만(韓滿)연변 「옥사독」 산속에서 사람들과 완전히 절연된 채 4년 8개월간 강제노동을 하였다.
「옥사독」, 이 단어를 필자가 이 지면에 싣게되자 쓰고 있는 말줄거리를 바꾸지 않을 수 없다. 「옥사독」 이 땅은 우리 성 베네딕도 수도회가 싹터 결실을 보게하는 거름주어진 땅으로 우리선배수녀들의 피와 땀을 흡수한 땅이다.
그곳에는 두분의 우리 선배 수녀들이 묻혀있고 무수한 희생의 비밀을 지닌 보물지로 우리 베네딕도 수녀회원에게는 둘도 없는 성지인 것이다. 수도복은 군복으로 바뀌고 그도 낡고 찢어진것, 굶주림과 심한 노동! 인간 대우는 개, 도야지 이상이었었다고 한다. 겨울이면 심지어 동사까지하여 17명의 신부 수사 수녀들이 죽었고 죽은 시체를 둘러서면 다음은 누구의 차례일까 서로 쳐다보는 침묵! 병들어 죽어가는 수녀를 홀로 남겨놓고 일터로 끌려가는 심정이 어떠했을까? 파견의 십자가를 받을때의 약속은 이 고난 중에 역역히 드러났던 것이다. 6.25사변이 종결되고 휴전조약이 성립되자 국제문제로 포로교환이 이루어져 살아남았던 수녀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눈물어린 눈으로 뒤돌아본다. 오! 너 「코리아」! 나의 파견된 땅!
이것은 당시 원장수녀가 한만국경을 넘어설때 읊은 시의 끝귀절이다.
■ 南韓서의 再出發
흩어졌던 한인수녀들은 남한에서 한테 모였고 여기에서 재출발을 했다. 이 1950년 모원으로부터 다시 수녀들이 입국하였다. 「코리아」는 그들의 원대로 다시 그들을 불렀다. 재출발한지는 13년이며 대구 신암동을 본원으로하여 서울특별시에 2개 분원, 대구공평동에 성주, 상주 등지에 각기 분원이 설립되었다. 대구 신암동에는 꽤 큰 현대식 「파띠마」병원이 있다. 천주께서는 모든 것을 풍부히 갚아주신 것이다. 이만큼 되기까지 물심양면으로 원조를 아끼지 않은 오지리, 독일, 기타 내외국 은인들에게 다시금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우리회는 본시 교육사업에 비중을 크게 두는데 휴전후 병원이 무엇보다도 요구되었기에 남한에서의 출발은 병원사업을 주로 하였다. 앞으로는 교육사업에 좀 더 힘쓸 계획을 하고 있다.
우리의 모원은 전술한 바와같이 독일 「툿찡」에 있고 아프리카, 남미, 북미, 필립핀, 폴투갈 등지에 수녀들이 진출하고 있는데 대개 교육사업을 주로 하고 있다. 특히 「마닐라」에 있는 음악대학은 명성이 높다. 문화사업은 우리나라같이 현대문명에 있어 앞서지 못한 나라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대하고 더욱 해방이후 도의교육이 다른 것에 비해 경시되는 경향을 보여주는 현금, 교육사업으로 이를 도와야 하겠다는 뜻을 수년전부터 품었다. 그리고 양보다 질에 주력할 뜻으로 미국 구주 등지에 일군을 양성하고 있는 바이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뜻대로 천주의 영광이 될 수 있도록 경향 각지의 제형들에게 기구를 청하며 10주년 축일에 이글을 드리는 바이다.
■ 布敎 聖 베네딕도會 沿革
1925年 11月 21日 첫째 4수녀들이 元山에 도착
1926年 6月 6日 元山단순원(PRIORAT) 세움
1931年 5月 25日 첫째 한국수녀 6名 許願
1933年 3月 19日 高山分院創立
1936年 10月 20日 會寧分院세움
1940年 7月 22日 清津分院세움
1941年 8月 22日 咸興分院세움
1948年 5月 18日 興南分院세움
1949年 9月 9日 元山수녀원 및 모든 分院 몰수당함
1950年 12月 8日 韓國修女들이 釜山에서 만남
1952年 大邱로 이사
1955年 獨逸修女들이 入國
1956年 1大邱 PRIORAT(단순원)으로 승급
1965年 現在 허원수녀 外國人 獨逸人 16名 日本人 1명 本邦人 54名
修練修女 15名
예비수녀 청원자 국내 44名 유학 8名
지원자 국내 35名 유학 9名
김마리아 베다 수녀 文責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