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11월도 지나고 12월에 접어들 이 무렵이면 으례히 맞이하게 되는 장림시기, 정녕 올해에도 어김없이 돌아왔나보다.
울론 이 장림은 무엇보다 성탄을 앞둔 삼사주간의 준비인만큼 그 모든 정신이 이 예수성탄에 쏠려있음이 전제로 나타나고 있다. 실상 우리는 작년에도 또 재작년에도 성탄을 지냈다. 그리고 금년에도 지낼 것이다. 하지만 마치 체바퀴나 돌리듯 성탄이 돌아오기에 앞서 맞이하고 다시 돌려 보내게 되는 것만으로의 장림시기가 될뿐일까?
하기야 장림시기의 4주는 고교 이스라엘 백성들이 4천년 동안이나 구세주를 애타게 기다리던 때의 축소판으로 이것을 예전에 반영시켰으리라. 예전상의 주기를 따라 그 본래의 의의를 되살려 보아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4천년전의 이스라엘 백성들 그대로의 심정으로 되돌아가 보자는 반복지심에서가 아니다. 엄연히 예수 그리스도는 구세주로 탄생하셨고 그것은 2천년전의 역사적 사건으로 등장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확연히 약속된 구세주 메씨아를 구약에서처럼 갈망하기 보다는 강생하신 메씨아의 이른바 새로운 내림을 잘 영접할 수 있도록 함에서 이 장림시기 본연의 의도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뜻에서 다음 몇가지 점을 추려본다면 인류구원의 역사를 살펴볼 때 구속사업은 이미 완성되었고 교회의 초자연성으로 인하여 내포된 온갖 구원의 열매도 계속 전해지고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이후에 맞는 성탄절의 준비는 그리스도 신비의 일부분을 이 장림시기라는 예전적 주기안에 현실화 하는데서 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크리스챤의 장림은 우선 우리를 찾아 임하여 주시는 이가 천주시라는 점, 즉 천주와 인간과의 대결에서 언제나 「이니시아티브」를 취하시는 편은 천주이시다. 당신의 영원으로부터의 계획을 제때 제때에 이행하시어 전적으로 그에게 종속된 우리인간편으로는 다만 순응, 그러나 능동적 순응이요 할 따름이다. 그도 그럴것이 말씀의 강생이 피조물인 마리아를 동하여 이룩된 점에서 그가 이 장림시기에 차지하는 비중이 실로 클진대 그의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FIAT』)라는 한마디는 천주님의 선차적 요구에 대한 결정적 답으로 전인류, 나아가서는 전피조물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아니 순간 순간마다 끊임없이 찾아주시는 예수님을 과연 자기는 얼마나 받아들이고 있느냐가 당면한 문제이다. 자신의 문을 닫고 예수님을 외면할 때 다시 말해서 인간이 신을 떠나 고립될수록 최악의 불행을 자아내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현대의 위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신을 필요로 하는 것은 인간 자체이지 자립존재로서 그야말로 완전무결하신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 천주께서는 우리 죄인을 찾아 오신다는 점 즉 우리 중 뉘라서 자기는 구원이 필요없이 결백하다고 자처하겠는가! 반면에 생명이 존속하는 한 그는 아무리 대죄인일지라도 구원의 대상이 되니 아직도 회개할 시기는 늦지 않았다. 여기에 또한 장림시기는 겸손과 감사, 보속과 희망의 기쁨이 용솟음치게 장식되고 있음이 엿보이기도 한다.
이로써 우리는 거듭되는 죄악중에 허덕이면서도 구약에서 고대하던 『엠마누엘』 (주 우리와 함께 계신다)의 실현을 보았고 이런 인사를 몇번이고 되풀이하게 되는 주의 자녀로서의 우리는 『나 세상 마칠 때까지 항상 너희와 한가지로 있노라』(마테오 28 · 20)의 말쓰맫로 이 장림시기의 과정을 통하여 실은 다른 또하나의 내림, 그러나 이는 아버지의 품안으로 자신을 결정적으로 대령시키는 내림에 점차로 임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앞으로 우리 각자의 생명이 얼마나 연장될는지 알 수는 없으나 지금의 장림이 두번 다시 못돌아 오는 시기이겠고 쉴새없이 흐르는 시간의 연속으로 우리앞에 놓인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시기가 그만큼 단축되기에 이번 장림을 맞는 크리스챤은 지난해 어느때보다도 두터운 각성 아래 내적 생활의 개선이 촉구되는 바이다. 또한 이런 것만이 다가올 뜻깊은 성탄에 있어 마음속으로부터의 「메리 크리스마스」를 주고 받을 수 있겠기에.
徐祐錫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