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敎實話(전교실화)] 길 잃은 양을 위해 (20) 間諜(간첩)의 버리지 못한 唯物論(유물론) ③
발행일1966-12-11 [제547호, 2면]
『그러나 그것은 괴변에 가까운 지나친 이론의 기교입니다. 그러한 기교로서 자연과학의 진리를 모순의 함정에 빠드린다는 것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또 이론의 기교라고 합니까? 궁지에 빠지면 흔히들 그런 변명을 합니다만 이번엔 우리 형이상항적(形而上學的)인 문제를 한번 다루어봅시다.』
『여기 3이란 숫자와 4란 숫자가 있읍니다. 이것을 합하면 얼마가 되지요?』
『그야 7이지요』
『네, 그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 7이 된다는 판단자체는 어디서 생긴 것이지요?』
『그야 인식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까?』
『네, 인식! 바로 말씀하셨읍니다. 우리가 이와같이 물질에 의한 증명없이도 인식에 의하여 증명될 경우가 있읍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읍니다만 인간의 눈은 불완전한 것입니다 .이와같이 불완전한 눈으로 보아야만 빋겠다는 어리석음, 이것이 바로 교만이라는 것이지요. 사라은 자기 뒷통수이 존재를 보고 믿나요? 인간은 자기의 조상을 보았나요? 그러나 믿고 또 자기의 존재로 그것은 엄연히 증명되는 것입니다.
이같이 행동이 정신의 존재를 증명해 주고 정신은 영혼, 영혼은 천주님의 존재를 실증해 주는 것입니다.
『물론 좋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조금전에 말씀하신 7이란 숫자에 대한 인식은 어디까지나 어떤 물체에 의한 선험적(先驗的)인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물체에 의한 인식보다 그 인식이 어디로부터 말미암은 것인가가 문제인 것입니다』
내 마음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오 주여! 선지자 모이서에게 하듯이 저에게도 말과 지혜와 능력을 주시옵소서)
그후로도 나는 그에게 「천주교요리문답」 「진리본원」 「상해천주교요리」 「무엇하는 사람들인가?」 「교부들의 신앙」 등등 여러책을 계쏙해 넣어주기는 했다.
1960년 11월 10일 광주지법에서 일심판결에 사형언도를 받은 그는 고법, 대법 긜고 두번의 재심과 항고까지도 모두 기각을 당하고 말았다.
1962년 4월 13일 서울교도소로 올라온 이래 여러번의 전방을 통하여 그때마다 감방을 찾아다니며 무려 5년동안이나 되는 기나긴 나날을 전교했으나….
1966년 4월 12일.
운명의 때는 이르고야 말았다.
그날도 나는 구치과 교무분실에 있다가 과(課)에서 급히 부르기에 가보니 집행이라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기회로 그에게 대세(代洗)를 권고케 하기 위해 서대문성당 김병기 신부님을 찾았으나 부재중, 용산성당 김윤상 신부님을 찾아도 병중, 그리고 윤형중 신부님 역시 성모병원에 입원중이라 이렇게 하나같이 모두가 이루어 지질 않아 급기야 나는 내가 대세의 준비를 해가지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 모두가 천주님의 뜻이었는지 모르지만 사실 그날 신부님이 오셨어도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약20명의 교도관이 사엄하게 경비하는 가운데 나는 집행관 옆 자리인 입회석에 섰다.
조금 후 안색이 창백한 그는 양쪽으로 두 사람의 교도관에 의해 부축되어 들어왔다. 그리고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한 가운데 판결문은 낭독되었고 그는 약간 고개를 든 채 듣는둥 마는둥 실눈을 뜨고 있었다.
판결문 낭독이 끝난 후 최후로 집행관이 그를 향하였다.
『가족에게 남길 유언이라도 있는가?』
감았던 실눈을 뜬 그는 생침을 한번 꿀꺽 삼키드니 꺼져가는듯한 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