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신부님의 글에 깊이 느낀바 있읍니다.(11월 7일 4면 敎勢統計再考) 모든 오해는 이해부족에서 오기 쉬우므로 이해에 도움을 주며 또한 찬성(=강조)과 거기보태는 어떤 「스젯션」이 되기를 바라는 겸손한 뜻밖에 없읍니다.
첫째, 교세통계표가 교구행정의 「데스크」를 떠나서 신문에 발표될때는 행정의 의미를 벗어나는 만큼 좀더 일반적 관심거리만을 부출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많은 숫자가 아니고 「차타」로 나타내면 훨씬 알기 쉬울 것입니다. 요즘은 국민학교나 면사무소에서도 그렇게 발달된 「차타」 행정을 한다고 합니다.
둘째, 과연 통계안에 철학은 없을 것입니다. 통계가 무엇을 뒷받침할 수 있기에는 그자체가 아주 과학적이라야 정책수립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법인데, 더구나 「종교사회학」적인 분석을 받자면 그만큼 용의주도한 통계라야 하지 않겠읍니까? 어떤 지방의 사회상태와 인구구성이 크게 다른데 마치 한학교 한학년의 A반과 B반을 비교하듯 할 수 없고 또 통계작성의 어떤 기준이 부분적으로 선다해서 다 해결 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교세통계는 공식적이고 법적근거로 된 것이므로 사견(私見)을 곁들일바 못되는 것이나 만일 앞으로 개정된다면 이에 앞서 상당한 연구기간을 두고 검토할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셋째, 토마스 신부님의 글 중 『요새와서 가톨릭 구제회에서 나오는 밀가루가 별로 없어진 것이 여기에 관계되지 않을까?』한데 가서 『여기에』한 것은 신자증가율을 말한 것인데 「증가율」의 크기와 폭에 영향을 준 원인의 전부를 『여기에』 붙인다면 이는 『솔직』하다기 보다 너무나 소박한 관찰일 것입니다. 토마스 신부님은 『여기에』관계된다고 단정하지는 않았읍니다.
사실 한때 전시하의 기맥힌 사정아래 토마스 신부님이 지적한 사례가 있었던 만큼, 후일의 조심성있는 사가(史家)의 붓으로도 몇마디 언급이 있을줄 각오해야 할줄 압니다만, 그러나 이와 관련시켜서 양(量)과 질(質)의 논리를 편다는 것은, 그간에 좀더 보충 설명이 아쉬웠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왜냐하면 구제혜택을 필요로 하는 전교대상(對象)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버릴 수 없는 전교의 영역(領域)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경제와 휴메니즘』을 연상할 수도 있고 직접으로 극빈자에의 전교문제(EN MISSION PROLET ARIENNE)를 제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1940년부터 종전(45년)까지의 한국의 전교 상황에서 보더라도 만일 이것을 다른 전교지방과 비교하면 놀랄만한 것이었읍니다. 44년말 현재 어느 전교지방들에서는 40%내지 80%까지 냉담자를 냈을 때도 한국은 냉담자율은 오히려 지금보다 적고 미약하나마, 그래도 증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을 조사해 본적이 있읍니다. 오늘의 이런 큰 영광(신자증가)은 외국전교신부님들의 사도적 열성에 크게 힘입고 있으며 한편, 이런 전교의 황금기가 언제까지나 계속될 줄 믿지 않는 만큼 토마스 신부님의 글은 하나의 귀중한 경고로 감명 깊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附記」 62년 8월 ×본당의 냉담자(任意標本) 조사결과 극빈자 즉, 구호대상자는 전체의 0.04%에 불과했읍니다. 이것은 신자증가율과는 별도의 항목이나 과연 어떤 층이 냉담하고 있느냐는데 유력한 자료가 되겠읍니다.
一讀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