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盧世賢 副祭 (原州敎區)
내가 지향할 李尙迪 司祭型 버림받은 자의 慰勞
하나의 사제가 되기 위해 10여년간 신학교에서 학업과 훈련을 쌓아오는 동안 부모님 친척, 은인, 기타 모든 신자들은 한결같이 착한 신부, 열심한 신부가 되라는 간곡한 격려와 부탁의 말씀을 들어왔다. 그러나 사제가 되어 직접 본당에 나아가 강론과 성세성사를 집행하면서 좀더 신자들 속에 파고들어가 볼 때 이제까지 내가 들어온 격려나 부탁과는 좀더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아무리 사제지만 언어의 예의를 지켜달라든가 너무 권위와 엄격을 내세우지 말아달라든가 또는 기타 신자들의 요망사항에 귀를 기울여 달라든가 하는 것이다.
무릇 사제는 제단에 봉사자로서 천주와 사람 사이에 중재 역할과 천주성총의 분배자로서 신자들을 명하고 가르칠 직분을 받았다. 따라서 신적 권위로 볼 때 사제는 존엄한 존재이지만 인간으로서이 약점과 허약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인간적 모든 결점을 극복하고 희생과 절제로서 얼마나 인간적으로 완전해져야 하는가에 문제가 있다.
사실 사제가 되는 단계와 완덕에 나아가는 단계가 틀리지 않을딘대 오늘의 나는 정말 부끄러운 존재임을 감출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사제로서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의 모범이였듯이 나는 내 성소에 대한 확신과 용기로서 아직까지도 닦지 못한 덕에 희생과 절제로 주력할 것이며 내 신앙과 성실을 토대로 맡은 직분을 충실히 이행할 따름이다.
정말 사제의 손길이 요구되는 사람들 예컨대 죄중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사제로서의 역할을 다하겠다는 것이 외람되나 새로 사제가 되는 나의 이상이다.
■ 박형진 副祭 (대구대교구)
자신의 허약 앎으로써 오히려 굳세어져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있다. 기쁨과 두려움으로 설레이는 가슴을 달래면서 신학교란 복된 못자리에 옮겨 심어진지 어언 십년에서 한해가 모자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제 서품을 눈앞에 무고 지난 생활을 돌이켜 보고 또 앞으로의 사제생활을 그려볼 때 착잡한 감회가 엇갈림을 막을 길이 없다.
사실 사제가 되겠다는 희망이야 말로 지상폭표였고 기왕이면 교우들이 원하는 원만한 사제가 되려고 노력했건만 막상 따지고 보니 무엇하나 나아진 것 없고 보니 앉은뱅이 용쓴격 밖에 되지 않았나 보다. 더구나 사제직이 고귀함과 나의 나약을 견주어 볼 때 다만 두려울 뿐이다. 그러나 『나 허약한 그때에 오히려 굳세노라』고 고백하신 바오로 종도의 표양을 본받아 그리스도께 굳게 신뢰할 때 주께서 만사를 선으로 인도해 주시리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어찌 내가 약하다고 두려워만 할 수 있으랴? 세상과 죽음까지 쳐이기신 승리자를 본받아 용감히 전진해야 하지 않겠는가?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군은 적도다』 하신 오주의 말씀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았고 황금어장에는 풍부한 물고기들이 어부들을 기다리고 있건만 일군들이 적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는지 생각해본다.
일군이 부조가면 먼저 나 자신이 열심히 일하면서 일군들을 모아야겠다. 그러면 가장 믿을 수 있는 벗들에게 청해보자.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종이라 부르지 않으시고 벗이라고 부르시니 나도 모든 사람들을 찾아가서 친구가 돼야겠다. 우선 그들과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퍼하는 벗이 돼야겠다. 그런 다음에는 힘을 모아 같이 고기잡으로 가자고 간청해 보련다.
요컨대 나는 모든 사람의 벗이 되고 싶고 그리고 그들이 땅속에 묻어둔 은전을 캐내어서 자신과 남을 위하여 영육간에 요긴하게 쓰게 하고싶다. 우리 서른 다섯을 밀어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