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레스띠나」의 한 작은 마을인 다위의 읍 「베틀레헴」은 우주의 가장 작은 遊星위에 있는 가장 작은 위치이다. 어떠한 위대한 왕국도 이 「베틀레헴」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목동들이 들에서 양을 치면서 내일을 위한 아무런 기대도 없이 매일의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 갔을 뿐이다. 이 「베틀레헴」에 우리는 성탄을 축하하러 간다. 오늘날 성탄의 意義는 자꾸만 흐려지고 있는 것 같다. 「산타 할아버지」, 商街의 성탄장식, 구유, 그외 성탄 민속 등은 그것이 종교적 감정과 더불어 결합할 때 물론 좋은 것이다. 그러나 「베틀레헴」의 그 根源을 더듬어 볼 수 없으리만큼 거리의 「네온」 불빛에 쏟아져 나온 인파가 난잡한 밤을 이룰 때 이 첫째 사건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베틀레헴」으로 갈 수 있을양이면 우리의 기쁨이 동반하는 이 인간적 축제기분과 그리스도의 탄생을 혼돈해서는 안될 것이다. 적어도 잠시동안 인간적 축제기분을 잊어버리고 강생의 진리를 초자연적인 사실에서 赤裸裸하게 발견해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만 이 인간 축제기분이 목동들의 경우처럼 주님의 영광으로 둘러싸인 성탄 우리의 신앙의 요구위에 있는 성탄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苦行者 氣分에서 성탄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하나의 매우 순수한 신앙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베틀레헴」에 관한 본질에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킬 필요가 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신비의 먼 언저리에서 왔다갔다 하는 것 밖에 못될 것이다.
해마다 우리는 주님이 인간 사이에 오신 그날밤에서 조금씩 더 멀어지고 있다. 이것이 성탄의 意義를 희미하게 한다. 무엇을 위한 通禁解除인지 알 수 없다. 우리는 「베틀레헴」으로의 순례를 다시하고 사실의현실속에서 또 섭리의 교훈의 다른 현실 속에서 강생의 意義를 되찾는 몇가지 수고를 아끼지 말자. 우리는 이 시대에 가난한 자가 될 수 있다고 잘못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가난이 문화인의 安逸을 방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한다. 그리스도 시대에 가난한 자들은 그들이 富한 것을 보았을 때 자기의 처지와 비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 富貴는 본시오 빌라도의 궁전 속에만 있지 않다. 富貴는 거리에 넘치고 있고 그것이 가난을 冷笑하고 있다. 왜냐하면 가난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판자집에 산느 늙은이와 국민 소득이 올랐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성탄 선물 하나 사줄 수 없는 가정주부와 실직의 노동자 버림받은 병자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가난하다. 이점 우리는 그리스도 시대의 「빨레스띠나」의 사람들과 비슷하다. 이것이 20세기의 위대한 계시이다. 이 단순하고 비극적인 발견에 대하여 우리는 그것이 하나의 책망처럼 또 하나의 도전처럼 우리 눈앞에 나타나기 위하여 이렇듯이 오래동안 이렇게 기다릴 수 있었던가 자문하고 싶다. 성탄의 기쁨은 만일 우리가 사랑과 정의의 나라에 불린 참다운 세상을 보기를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부자연스러운 기쁨 외에 다른 아루것도 아니다. 공의회 이후의 오늘의 교회는 이러한 세상을 보고싶어한다.
그러나 이렇듯이 많은 일이 인간 생활 가운데 또 올가미가 많은 문명 가운데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우리는 어느점에까지 여기 공범자인지 알 수 없다.
구세주가 오신 후 20세기가 된 오늘 이점 우리 신자들은 언제나 양심 省察을 거듭해야 한다. 우리 시대에 이렇듯이 많은 사람들이 성탄을 마치 하나의 연중행사러첨 맞이하고 있다. 어린이 손에 천주의 사랑을 가지고 있는 그 「손님」의 現存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신자들의 가정을 위하여 성탄이 유일한 사건이 되도록 적어도 우리는 증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인간 가정의 「그리스띠아니즘」을 판단할 권리를 향유하는 증거이다.
성탄은 우리를 기쁨으로 초대한다. 그러나 어린이들이 눈에 볼 수 있고 빛나는 것이 될 수 있는 이 기쁨, 물질적인 곤란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이 겸허하게 나눌 수 있는 이 기쁨은 구원된 영혼의 행복이 모든 인간 축제 기분으로 흐리게 된 특색과 함께 그 기쁨을 드러내는 정도에서 그 충만한 힘을 가질 것이다. 성탄의 기쁨은 「베틀레헴」의 「메시지」는 언제나 그 本質이 실현되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을 목동들의 처지로 저하시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자기 이탈, 모든이를 위한 겸손 등을 가르치는 복음을 끈기있게 받아들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 내적 자유는 성탄밤에 천사의 소리가 반향할 때 우리에게 마련될 것이다. 「베틀레헴」! 그곳은 하늘을 聽音하는 땅이다. 우리는 「베틀레헴」으로 되돌아 가자.
申相祚 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