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敎實話(전교실화)] 길 잃은 양을 위해 (22) 에필로그
발행일1966-12-25 [제549호, 2면]
해는 바뀌어 내년이 올해가 되고 올해가 작년이 된다.
이제 교무과 분실 앞에는 개나리꽃이 만발하였건만 잎이 피고 지면 또 한해는 가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세월을 따라 한 사람씩 또 한 사람씩 천주님의 품안으로 인도한 것이 그럭 저럭 약 100여명 정도는 넘는다. 그중 반은 세를 받았고 나머지 반은 지금 현재 열심히 교리공부중인 예비신자이다.
대단한 수는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나의 가장 소중한 피와 땀의 결정(結晶)인 것이다.
최영오와 고재봉에게 끝내 세를 주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아직 잊을 수 없는 쓰라린 기억이지만.
그리고 실로 잊을 수 없는 사실은 이 교도소 안의 전교를 그가 처음으로 시작하였고 당시 서울지방법원에 계시던 김홍섭 판사님, 계속하여 1962년, 그때에도 세종로성당에 계셨고 지금도 계시는 박귀훈 신부님, 또한 당시 청파동 복자수녀원 지도신부로 계시던 윤형중 신부님, 윤 신부님이야 말로 이 교도소 안에 남기신 공적이란 참으로 크시다. 1965년인 작년까지도 쭈욱 계속하여 나오시다가 금년들어 병환으로 지금은 성모병원 4층 415호실에 입원중이시지만 지난 4월 2일 토요일 오후 시간을 틈타서 내가 성모병원으로 병문안을 갔을 때엔 수척한 몸으로 누워 계시다가
『고 분도!』
하고 나의 손을 꼬옥 잡으시면서
『이젠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애. 이젠 교도소에 못찾아가게 되겠어…』
하시며 비애에 가득찬 얼굴로 눈물을 글썽거리시던 것은 지난날 교도소의 전교를 위하여 춘하추동 궂은 날들을 가리시지 않고 나와 서로 이마를 맞대고 시간 가는줄 모르며 이야기를 주고받던, 이젠 돌아올 수 없는 지난날들을 회상함에서였는지….
말없이 고개를 숙인채 듣고 있던 나는 그만 복바차는 가슴의 울먹임을 참을 길이 없었다.
1963년도엔 혜화동 동성학교에 계시다가 동두천성당으로 가셨지만 당시 서대문성당에 계시던 백 도밍고 신부님, 그리고 작년인 1965년도엔 지금은 말죽거리성당에 가 계신다는 당시 서대문성당의 이 베드루 신부님, 1966년도인 올해부터는 현재 서대문성당에 계시는 김병기 신부님이 찾아오시고 계시지만 이 모두가 한결같이 한마리의 길잃은 양을 위하여 진실로 땀흘리고 수고하신 목자들이시다.
그리고 3 · 4년전 부터 김홍섭 판사님이 매달 교도소로 「경향잡지」를 40부씩 보내 주었으나 작년 그의 별세로 그 가족이 대신 원하는 것을 청렴결백한 판사님이 돌아가신 후 가산하나 남기시지 않은 그 유가족의 극빈한 경제난을 생각하여 사양하였고 마침 이름모를 어떤 독지가에 의해 그 대금(代金)을 잡지사에 지불함으로써 현재까지 「경향잡지」는 매달 40부씩 계속 오고는 있다.
한편 1964년 1월부터 1965년 12월까지 2년간 홍 세시리아라는 분이 (지금 국제여자협조회원) 매달 「가톨릭시보 50부씩을 보내주었으나 그녀가 수녀원으로 들어간 후 성 원선시오 아 바오로회에서 개인적으로 보내주는 것 외에 1966년인 올해부터는 「가톨릭시보사」에서 매달 30부씩 그냥 보내줄 뿐이다.
그러나 부수가 모자라서 교대로 교환해 넣어주다가 이것조차 넣어주지 못할 경우가 잇으니 또한 이것 뿐이랴. 영세한 사람에게 공과책이며 묵주와 상본을 주지못할 때면 빈약한 내 월급 봉투가 원망스럽기만 하다. 성 원선시오 아 바오로회에서는 지난번 고맙게도 몇권의 책을 가지고 오신일이 있었고 1966년 3월경 박도식 신부님이 한아름의 책을 가지고 오신 것 외에 윤형중 신부님이 계속 가지고 오신 책은 실로 많았다.
예싼이 전혀 없다시피한 이 교도소 안 교무과의 책은 이렇게 하여 간신히 마련되었지만 빈약한 장서중 그들이 보고파 하는 책들을 마음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나의 이 안타까운 심정은 언제나 해소되려는지….
여기 잊어온 인생들이 있다.
여기 천주님을 간구하는 무수한 길잃은 무리들이 있다.
개나리 핀듯 하더니 지난밤 보슬비에 벌써 녹음은 물들고 맑게 개인 하늘은 푸르르기만 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