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축하도 많이 달라졌다. 내가 60년전 젖엄마(乳母)의 등에 업혀 명동(明洞) 큰성당에서 본 축하잔치는 우선 뾰족한 지붕에서부터 수박등이 여러줄로 켜있어 얼마나 황홀했던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때는 양반과 상민과의 계급이 뚜렷하던 때이라서 여자들은 모두 노면(露面)하는 것을 흉으로 여겨 누구나 장옷, 아니면 치마를 쓰고 성당에 나왔다. 자기 남편과 촌수 가까운 친척 이외의 사나이에게는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것을 법으로 알았으니 부인네가 성당에 나오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한가지 다행한 일은 성당에서는 미사보는 머리에 쓰는지라 그것으로 적이 양반 부인의 체통을 유지하였다. 그렇게 성당 문턱까지 치마를 쓰고와서 성당에 들어설 때는 미사보로 얼굴을 가리게 되고 보니 한국에 있어서의 미사보는 안성마춤으로 또한가지의 역할을 한 셈이다.
남녀의 구별이 이렇듯 까다로왔으니 자시미사 후 떡국잔치가 있어도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멀리 떨여져, 남보듯이 지냈다. 그러나 여기서 따져둘 것이 그것은 곧 여자를 안방에서 대문안에서 바깥세상 넓은 천지로 이끌어냈다는 사살이다. 우리나라의 여성해방의 첫걸음이 여기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비록 남자들과는 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여자들이 남자들과 같은 지붕 아래서 천주님의 성탄절을 축하했다는 사실은 하나의 부산물이긴 하지만 여성해방의 실마리가 여기서 풀렸다는 것이다.
▲그다음 내 나이 40대 - 40대에 이르러서는 세상은 제법 밝아져서 치마를 쓰지 않고도 어엿하게 대문밖을 나서는 소뤼 신여성들이 거리를 누비게 되었거니와 이때쯤 해서 성탄절은 그야말로 아들 딸들이 서로 마음을 아울러 천주님께서 태어나신 날을 경축하는 잔치가 푸짐해졌다. 성가대가 남녀 혼성으로 어깨를 나란히 제대 앞에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노래를 부르기에 이르렀다. 남자는 남자만으로 여자는 여자끼리 자리를 따로 할 때와는 판이한 현상이다. 매사에 무슨 큰 일이 벌어지면 남자가 할 일과 여자라야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법인데 서로가 협동하지 않던 시절의 불편은 이제 흘러간 세월과 같이 사라지고 남녀평등 · 피차협조로써 천주님의 탄강(誕降)을 기뻐하는 잔치는 자못 풍성해졌다.
남녀교우가 정성껏 성당을 아름답게 꾸미고 「프로그람」을 다채롭게 마련하게 되고보니 크리스마스경축절차는 참으로 알차고 호사스러운 보람에 가득차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것이 요즈음에 이르러서는 교우보다도 일반시민이 한곱 더 떠드는 기현상을 보이는 것은 웬일일까. 야간통금을 풀어준 당국의 뜻은 자시미사에 나아가는 교우를 위함인데… 어느틈에 이 기회를 이용하는 시민들이 등장했는지. 성당 주변보다도 번화한 거리가 더욱 분비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우리로서는 가타 부타 속단키는 어려우나 낯을 찡그리게 하는 난장판을 목격할 때 감회는 착잡해진다.
더우기 크리스마스 선물에 이르러서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허다하다. 본시는 교우끼리 마음가득찬 선물을 주고 받고 이날의 기쁨을 같이하는 것이겠지만 요사이는 크리스마스만 가까워 오면 교우보다도 믿지 않은 이들이 앞장서 설레는 역현상이 벌어진다. 비록 믿지는 않아도 만왕의 왕이신 오주 예수님의 탄강을 기뻐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긴 하지만 성탄절을 이용하여 허례(虛禮)에 빠지고 아첨 아부 폐풍이 휩쓸때 마음 아픔을 금치못한다.
금년 1966년부터는 당국에서 일반시민의 탈선된 행동을 적극 제지하려는 눈치이다. 이것은 신중이 해야지 무작정 꺾어누르다가는 부풀어 오른 성탄절의 축하행사에 흠이 가지나 않을까 조심스럽다.
李瑞求(劇作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