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8·15 해방의 이듬해, 그러니까 1946년 크리스마스때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때 나는 북한괴뢰정권의 기관지인 「民主朝鮮」紙의 주필로 있었다. 평양의 성탄절이 소리도 없이 지나간 2 · 3일 후 사내 공산당세포위원장이 심상치 않은 얼굴을 하고 내방(주필실)을 찾아왔다. 『또 무엇이야?』하고 나는 섬짓하였다.
신문사에서도 주필보다도 당위원장이 당적 발언권이 세어서 언제나 시끄러운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가 그는 야단났다는 듯이 말을 끄집어 냈다.
『주필 동무, 일났습니다. …편집국의 黃健 記者와 누구누구가 크리스마스날밤 몰래 모여서 크리스마스 기념축하를 했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구역당(區域黨)에서 먼저 알아가지고 지금 막 내가 불리워 가서 한참 야단을 맞고 왔읍니다. 당장 그 「반동」기자들을 모조리 엄중처벌을 하라는 것입니다』
과연 일은 곤란하게 되었다.
『거참…그러나 우선 진상을 알아봐야지. 우선 오늘밤 세포회의를 열어가지고 본인들로부터 사실여부를 알아보고 자기비판도 시키고 어떻게 관대하게 해결해 보도록 하시지요. 출당이라도 맡게되면 그 앞날이 딱하지 않소』
나는 세포위원장으로부터 이렇게 달랬다. 이때만 해도 호랑이 담배 피울때다. 그런 엄중한 일을 저지른 「반동」을 그 기관 책임자로서 감히 어떻게 관대히 처분하자고 당앞에 제의할 수 있으랴!
나는 세포회의에 앞서 문제의 「반동」기자들을 내방으로 불렀다. 사실은 나와 이들은 「주필」과 「기자」라기 보다 내가 가장 아끼는 문학청년들이요 후배요 술친구들이었다. 黃健은 그때 이미 단편소설을 발표하고 있었고 白某는 해방후 서울서 林和의 소개장을 가지고 월북하여 나를 찾아온 기자였고 또 한 청년은 일제시대부터 내가 길러온 기자였다.
오늘밤 술먹자는 의논이나 하려는가 하고 주필실에 들어온 그들에게 내가 「문제」를 전하자 그들은 금새 얼굴이 샛파레지면서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그날 - 25일 밤에도 일이 끝나는 대로 여느날과 같이 한잔 할까 하고 의논이 맞아 셋이서 신문사의 외상이 통하는 뒷골목 술집으로 가서 소주를 들이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흰눈이 펄펄 내리는 것이 창밖에 보여 누군가가 『눈이 온다. 아! 멋진 크리스마슨데…』 한 것이 발단이 되어 『오늘밤 서울 거리는 굉장하겠다!』 『우리 집에서는 내 생각이 간절하겠구나』(白 기자의 집은 기독교 가정이라 했다) 등의 대화가 오가고 그만 기분이 지나쳐서 극히 낮은 목소리로 성탄절의 노래를 「의미없이」 팡창해 봤다는 것이다.
그저 그뿐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누가 어마어마하게 밀고를 한 것이다.
사실 나도 기가 막혔다. 사실은 나도 그날 저녁 늘 하는 버릇대로 글 친구이며 술 친구들은 작가 金史良 田在耕 등과 같이 술을 마시며
『그래두 크리스마스라구 눈만은 제대로 내리누나…』
등의 몇마디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의미없이」 한 소리였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가슴이 서늘할 노릇이다.
그 정도의 것이 뭣이 그리 대수롭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것이 통할리 없다. 결국 「반동」기자 세명은 내가 시키는 대로 당세포회의에서 엎어두고 잘못했다고 빌고 자기비판을 했지만 끝내 출당, 철직(撤職) 즉 신문사 파면의 결정이 내렸다. 그후 내가 중앙당에까지 똧아 다니며 교섭한 결과 출당만은 일등 감하여 「엄중경고」로 낙착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후일담이 있다. 졸지에 직장을 잃은 세 기자는 그후 술을 한병 사들고 우리집을 찾아와서 그래도 고맙다면서 울고 불고 야단을 했다. 나는 여러가지로 위로를 해보냈다. 그랫는데 이것이 또 어떻게 당에 알려져서 이번에는 내가 당에서 「경고」를 받았다.
김일성 일당의 종교, 특히 기독교 탄압은 해방 직후부터 이렇듯 어거지로 철저하였다. 이 전통이 나날이 더 심해가서 오늘 마침내 공산북한은 공산세계 중에서도 종교탄압이 가장 극심한(중공보다도 훨씬 더 심하다) 지옥으로 악명을 날리게 된 것이다.
기독교의 도시, 평양거리에서 「거룩한 밤」 「징글벨」 소리가 끊인지 이미 20년이 넘는다. 언제나 다시….
韓載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