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는 벌판에서 났지만 자라기는 두메산골에서 자랐다. 산골이라 그런지 시워달만 되면 된서리가 온통 하얗게 내리고 사월달이 다 되어도 아직 눈이 펄펄 내리곤 했다. 날씨가 추워지면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을 옆구리에 끼고 따스하게 느끼면서 손을 호호 불며 십리가 넘는 고갯길을 넘어서 학교에 가야만 했다.
이러구 얼마를 학교에 다니느라면 성당에서는 「구세주 빨리오사」의 노래가 시작된다.
이 노래만 들으면 지금도 어찌나 기쁜지 모른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얼마 안기다리면 방학이 오고 성탄이 온다. 성탄이 오면 여기저기 이웃 공소에서 사람들이 모여든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 어찌나 기뻤던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들뜬다. 그 순진한 사람들이 방마다 그득하게 앉아 한솥의 밥을 먹고 웃으며 다정하게 지내던 그 하루가 나에게는 그렇게도 기뻤던 것이다. 그때 보통학교에는 애 아버지가 꽤 많았다. 그런데도 학교에서는 꼬마인 나를 반장을 시켰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무서워 내 말을 잘 듣던 애아버지들이 교문만 나서면 나를 못살게 구는데는 딱 질색이었다. 나를 떼놓고 도망치면 혼자서 그 무서운 고갯길을 울면서 넘어야 했다.
천주님의 은혜로 무사하긴 했지만 하루는 호랑이까지 만난 일이 있었다. 학교 길이 그때는 왜 그리 무서웠는지!
그런데 바로 그 길이 성탄 전날 아침부터 사람들로 히끗 히끗해 지면서 나는 참으로 좋아서 어쩔줄 모르고 그분들에게 꾸벅 꾸벅 절하면서 우리집으로 모셔들였다.
성당에 가서는 온통 마당에 등을 달고 성당 길 양쪽에는 종이로 고깔을 접어 모래를 넣고 초를 꽂아 놓았다.
밤에는 연극을 해서 그 순간진한 교우들을 웃기며 느끼던 그 즐거움은 지금도 내 근심 걱정을 덜어주고 있을 정도다.
자정미사 직전에 본당신부님은 보미사 어린이들을 모아놓고 상을 주시는데 한번은 어른이 져도 한짐은 될만한 큰 보따리 하나가 내 차지가 되었다. 행여나 누구에게 빼앗길가 보아 이웃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집에 갖다놓고 자정미사에 보미사한 일이 있다.
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집에 와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풀어보는데 아무리 풀어도 끝이 없었다. 나중에 가서는 풀어 제친 종이조각이 방안에 그득하게 싸히는데 이런이 조막만한 것이 땅에 굴러떨어졌다. 풀어모니 성냥 한갑이 들어 있었다. 방안은 온통 웃음 바다로 떠나가고 있었다. 어릴때 이런 추억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신학교 있을 때 방학만 되면 설레는 가슴을 안고 운전수를 달래가며 나의 추억의 길을 찾아갔다. 그 길을 천천히 달리면서 맘껏 향수에 취해보곤 했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 가지를 못하고 있지만 복잡한 일을 처리하느라면 멍하니 앉아서 그 길을 달리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기 일쑤다. 꿈에서 깨어나고는 『야! 사람에게는 누구나 이런 약점이 있는가 보다』 생각한다.
황민성 주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