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알려지지 않은 교회사] 聖堂鍾(성당종) 감추기에 苦心(고심)
8.15날 우렁차게 울리고
日帝末(일제말) 黃海道(황해도) 信川本堂(신천본당) 具神父(구신부)의 善心談(선심담)
발행일1965-12-05 [제497호, 4면]
일제말엽에 이르러 교회탄압상은 여러가지 모양으로 나타났다. 그중 하나로 성당종까지도 헌납하라는 총독부의 지시를 들 수 있겠다.
황해도 신천본당주임으로 일하던 具天祐(요셉) 신부는 성화같은 놈들의 독촉과 날카로운 감시속에서도 그대로 성당종을 보존하여 오기까지의 한토막 숨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때는 1943년 봄 부활절이었다. 일반가정에서는 벌써부터 주발 숫가락 놋대야 화로 등 모두 거두어들이고 있었지만 아직 성당 종을 바치라는 지시는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주교님의 공문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은 교회법에 의해서 교회의 중요한 성물중의 하나인 종을 결코 헌납할 수는 없다는 내용이었다. 공문을 받아들은 구신부는 이상한 예감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날 저녁 성당 종을 떼어 버렸다. 신천성당 종은 전임자였던 이도마 신부가 불란서에서 사들인 것으로 놋쇄로된 아름다운 것이었다. 소화데레사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지름이 1「미터」나 넘고 높이 1「미터」 가량의 아름찬 것으로 다시없는 귀한 것이었음을 알게 한다.
성당 지하실안에 교우들의 힘을 빌려서 운반은 해놓았지만 구신부의 고민은 컸다. 어디에 감추면 좋을까. 또 누구의 힘을 빌리면 좋을까. 혼자서는 쳐들 수도 없으니… 그러나 궁리 끝에 구신부는 지하실 담벽돌을 헐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도와 달라고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극비에 붙이기 위해서였다. 그 무거운 종을 겨우 겨우 움직이어 담벽안에 감추는데 성공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애쓰며 비지땀을 흘렸겠는가 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지 않다. 이때 신부의 생활은 일일이 감시 받고 있었으며 언제라도 마음 내키면 고등계 형사는 자기집 드나들듯이 다녀가던 때였으니 구신부의 가슴조림은 대단했다.
당시 주교댁에는 「구로가와」라는 일본인 신부가 있었는데 육군본부에서는 신부를 불러내어 무섭게 위협했음이 사실이어서 다시 주교님은 전번에 보낸 공문과 반대 내용의 공문을 띠우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구신부의 예감은 들어맞았다.
그런데 신천읍의 고등계 형사가 갈리게 되었다. 이때 벌써 일반 가정뿐이 아니라, 예배당의 종 등은 수십개가 거둬져있었다. 그렇지만 무쇠로된 예배당 종을 그들은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
하루는 새로 부임해온 고등계 형사가 인사차 구신부댁에 왔다가 가면서 상당종각을 바라보면서 하는 말이 『신부님은 벌써 종을 바치셨군요!』하고 웃는 것이었다. 신부는 그렇다느니 안그렇다느니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잠자코 있었다. 종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구신부의 걱정은 떠날날이 없었다. 재령에서는 경찰서원들이 와서 떼어 갔다는 소식도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날 잠시 외출하고 돌아오는 신부에게, 군청에서 왔다갔다는 것을 식모가 전해왔을때 또 한번 가슴이 철렁하였다. 그래서 군청에서 무엇때문에 왔다갔는지를 알아보았다. 마침 구청에는 아는 교우가 있어서 다름이 아니라 신부님이 헌납한 종의 무게 크기 등을 참작해서 갑을 치루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제서야 구신부는 뭐 신통치 않는 것이었으니 값은 사양하도록 하겠다고 해서 무사히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말았다. 이때의 기쁨은 눈물이 쏟아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고등계 형사가 교체되는 동안 신천성당의 종은 헌납한 것으로 되어버린 것이다.
1945년 해방을 맞았다. 구신부는 비로소 지하실의 담벽을 헐고 다시 종을 꺼내었다. 교우들의 놀라움과 기쁨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신천읍내 곳곳마다 은은히 울려퍼지는 성당 종소리는 해방의 기쁨 바로 그것이었다. 종이 받았던 수난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기도 하고 야단들이었다. 구신부의 뛰어난 기지와 그리고 기구중에 번쩍 머리를 들고 일어나는 예감이 신천성당의 귀한 종을 보존하게 해주었다.
물론 쉴새없이 가슴을 조려야만 했던 구신부의 괴로움이 따랐지만 옛일을 추억하는 오늘날엔 기쁨 그것이라고 성직자생활의 일면을 여심히 보여주고 있었다.